New York (2017 – 2021)

[2018.03.19]배움

Author
Irealist
Date
2018-03-20 12:08
Views
448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좀더 일찍 이 길로 올 순 없었을까? 


2년 전의 나는, 내가 컴퓨터과학을 전공하지 않고 경영학을 전공한 것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학교 때 물리 경시 준비를 했었으면서, 과고와 외고에서 입학허가를 받았을 때 후자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도 후회를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고교 시절에 외고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미국에 오지를 못했을 수도 있다. 학부 시절에 경영학을 하지 않았으면 미국 취업도 힘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처럼 데이터 사이언스가 뜰 때 얼른 갈아탈 순발력이 없었을 수도 있다. 공대가 인문대보다 훨씬 잘 나가는 세상이지만 공대를 나와서도 답없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그러니 고교와 학부의 전공 선택은 문제도 아니었고, 문제였다고 할지라도 후회할 필요도 없으며 그로부터 얻을 교훈은 딱히 없다. 


정작 짚고 넘어가야할 시간들은 학부 졸업 이후였다. 이미 딥러닝 혁명은 2009년도에 시작되고 있었고, 2011년에는 IBM의 왓슨이 Jeopardy에서 사람들을 제치고 우승하는데 이르렀다. 물론 거기까지는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2011년, 거래소 플로어에서 짧은 시간 일하면서, 자동화 흐름에 의해 플로어가 몰락해가는 모습, 그것도 몰락의 말기를 체험하지 않았던가. 이미 2013년에는 이것이 지속불가능한 방법임을 알고, 사장에게 레포트까지 제출했다가 미운털 박히고 떠날 생각까지 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컴퓨터 과학에 의한 자동화 흐름이 트레이딩 계뿐만 아니라 산업 전반을 바꿔놓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대체 무엇이 당시에 내 눈을 감고 귀를 닫게 만들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바로, '나는 할 수 없다,' '저것은 내 분야가 아니다,' '학부 때 했었어야 했다,' '늦었다,' '지금 해 봤자 학부때부터 했던 애들한테 상대가 안된다'라는 인식이었다. 요즘도 종종 내게 진로 상담을 해 오는 사람 중에, 요즘 우리 분야도 자동화 흐름 때문에 설 자리가 없어지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면 난 항상, 지금이라도 데이터 사이언스나 코딩 공부를 하라, 파트타임 석사를 하라고 한다. 하지만 백이면 백 하지 않는다. 첫번째로는 절박함이 없고, 두번째로는 문과출신은 더더욱 자기가 공부하기 늦었다 생각하고, 세번째로는 공부는 할 수 있더라도 학부 때부터 전공한 사람에 비해 못할 것이니 효율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는 이제까지 해 온 본인 전공을 살려서 그런 전공자들과 협업하는 걸 추구하겠다고 한다.


정확히 내가 했던 생각들이다. 나도, 트레이딩을 열심히 해서 나중에 개발자들을 고용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스턴, 홍콩에서 연이은 실패와, 알파고와 켄쇼의 기사 등을 보면서 막다른 길에 내몰린 절박함 때문에 커리어를 중단하고 석사를 가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정말로 큰 전화위복이었다고 생각한다. 연이은 불행이 나를 최적의 커리어 패스를 걷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위에서 언급했던 이유들 - 늦었다거나 해봤자 전공자들에 비해 비교우위가 없다 - 은 말이 안된다는 것을 비로소 안다. 우선, 데이터 사이언스 및 자동화는 앞으로 모든 산업 전반에 걸친 화두이자 공통의 언어다. 글로벌 시대에 있어 영어와 같은 존재다. 20세기에서 21세기 넘어가면서 글로벌화되고 있는 상황에, 영어 배우기가 너무 늦었다고 배우지 않을 것인가? 혹은, 내가 영어를 해 봤자 영문학과 전공자나 조기유학파에 비해 어차피 못할 거니까 난 내 분야나 열심히 하고 통역관 쓸거야라고 할 것인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지금 사회에선 누구나 어리석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90년대만 해도 30, 40대 중엔 그런 사람들 많았을 것이다. 이제와서 외국어 배워서 뭐하나, 통역관 쓰고 말지. 


데이터 사이언스와 컴퓨터 과학도 마찬가지다. 언어의 세계에서 영어와 중국어와 일본어를 합쳐 놓은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 무게로 모든 산업의 세계에서 앞으로 다가올 것이 이런 자동화 흐름이다. 요즘 자꾸 AI, 인공지능하면서 그 단어를 너무 느슨하게 쓰는 경향이 있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AI는 저 먼 세상 이야기고 엑스 마키나 같은 일은 우리 살아 생애에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데이터 사이언스와 자동화 흐름은 모든 산업 전반에 걸쳐 일어날 것이고 기존의 일자리들은 그러한 코어 지식을 아는 자리와 모르는 자리로 양분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 기로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것은 중요하다. 전공 지식을 좀더 깊이 알아서 차별화시킨다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앞으로는 전공들이 데이터 사이언스의 응용 분야가 되면서, 전공을 알면서 테크니컬도 아는 사람들이 일순위고, 전공은 몰라도 테크니컬을 아는 사람들이 이순위고, 전공만 아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삼순위가 될 수밖에 없다. 


나도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썼지만 그렇다고 내가 데이터 사이언스를 마스터했는가하면 한참 멀었다. 학사와 석사의 간극은 그리 크지 않지만, 석사와 박사의 간극은 마치 중학생과 대학생의 차이만큼이나 멀다는 것을, 켄쇼에 들어와서 박사들과 협업하면서 느꼈다. 또한 데이터 사이언스 석사를 했다지만 기본기가 부족하게 일년 남짓 벼락치기 한 학위라, 많은 부분에서 부족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너무 좋으신 팀장님을 만나서 모델링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있지만, 갈 길이 멀었다. 


그래서 석사를 하나 더 하기로 했다. 2년 전 내가 비참한 기분에 젖어 나날을 보낼 때, 콜럼비아 석사를 붙고 나서 했던 생각이 있다. 내가 만약 이번에 석사를 해서 잘 되어 취직이 되더라도, 절대로 그 잘된 것에 만족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정체해 있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라자드에서 켄쇼보다 더 높은 대우에 영주권도 바로 해 주겠다고 카운터오퍼를 했을 때 쉽사리 거절할 수 있었던 것도, 켄쇼에서 내가 훨씬 더 성장하고 배울 것이 많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욱 느슨해지지 않기 위해서, 이번 가을부터 조지아텍 컴퓨터 과학 석사를 한다. 사실 콜럼비아 석사가 1년 반이었지만 첫학기는 기초과목을 듣고, 두번째 학기 정도만 데이터 사이언스 제대로 공부했으며 마지막 학기는 프로젝트 3학점으로 끝났기 때문에, 못 들은 과목들도 많고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석사가 싼 편이 아니라서 또 하나 하기가 망설여졌는데, 조지아텍 온라인 석사는 졸업까지 6천불 가량이면 되서 일반 미국 석사의 정확히 10분의 1 가격이다. 


졸업 때까진 2년 반 가량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때가 되서 자리가 잘 잡히면 또 석사를 더 할 생각도 하고 있다. 20대에 학부를 졸업하고 배움을 계속하지 않은 것을 사무치게 후회하고 있으니, 30대, 40대, 50대, 그 이후가 되어서도 한순간도 배움을 멈추지 않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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