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2017 – 2021)

[2018.03.04]딸

Author
Irealist
Date
2018-03-05 07:18
Views
508

지난 달, 와이프의 임신에 대한 다운증후군 검사를 하였는데, 그 검사를 하면 성별도 알 수 있는 모양이었다.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건강한 딸이라고 하였다. 우습지만, 그 순간 잠시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들을 원했는데 딸이어서 당황스러운, 그런 종류의 당황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임신을 하면서 심사숙고를 해본 결과, 아들이면 아들인대로 좋은 점들이 많고, 딸이면 딸인대로 좋은 점들이 많다고 결론을 내렸었기 때문이다. 


내가 당황스러웠던 이유는 선호와 별개로, 막상 아버지와 딸과의 관계에 대해 내가 많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내가 아들이니까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많이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비록 누나가 있더라도 내가 누나의 입장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상상해본 일이 없었다. 또한 나와 다른 성이라는 것, 어머니라는 이성과의 모자관계, 와이프라는 이성과의 부부관계, 그 외의 여자사람들과의 타인관계, 그러한 프레임에서 완전히 별개의, 나의 피를 이어받고 내 유전정보의 절반을 가진 이 딸이라는 여성 생명체에 대한 모종의 신비감을 느꼈던 것이다. 


잠시간의 당혹함 이후에는 기쁨이 찾아왔다. 확실히, 지금 이 시대에서는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크나큰 축복이다. 미투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재는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 시기 이후 이어지고 있는, 남성 중심 사회가 몰락하려하고 하는 그 초입이다. 조금만 일찍 태어났었으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어려움만 겪었을 것이고, 조금만 늦게 태어났었으면 이미 완결된 스토리의 일부였을 것인데, 정확히 이 시기에 태어남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는 흐름에 동참하며 자아 실현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것은 아직도 가치관 구석구석에 보수적인 관념들이 숨어 있는 내게 있어, 스스로에 대한 시험이라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내 마음을 갈고 닦아서 내 딸이 타고난 천분과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무의식적으로라도 '아니 여자애가 행동을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니'라던가, '여자니까 외모에도 신경써야 돼' 등의 망언을 뱉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딸이니까 미술이나 발레를 가르쳐야지라던가. 성과 관련된 그 모든 고정관념을 내 마음속에서 뿌리째 정화하고 진정한 평등주의자가 될 수 있는지, 그에 대한 시험인 것이다. 


또 한가지 든 생각은 둘째가 아들이기를 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와이프는 나보다 여러모로 지혜롭고 현명할 때가 많다. 임신 준비를 하는 내내 나에게, 절대로 아들이면 좋겠다, 딸이면 좋겠다를 생각해서도 안되고 특히나 타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선 안된다라는 신신당부를 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일이란 것이 요지였다. 그에 동의해서, 계속해서 아들이든 딸이든 둘다 좋다는 것을 되새겼다. (여담으로 우습게도, 와이프는 임신하고 나서 갑자기 너무나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를 보더라도, 아들보다 딸이 부모에게도 다정다감하고, 특히 모녀지간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는 요지였다) 그런데 이제 첫째가 딸이고 나니, 둘째는 아들이었으면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드는 생각일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만일 둘째도 딸이라면 그 본인의 심정은 어떨까? 물론 애초에 이런 걱정들을 한다는 자체가 나도 구시대적인 가부장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 관념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걱정을 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자식을 잉태한다는 것은 정말 신비롭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소식을 들은 지난 달에는 그저 위와 같은 각종 생각들에 머리만 복잡해졌는데, 오늘 집청소를 하다가 갑자기 딸 생각을 하니까 너무 귀여운 우리 아기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행복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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