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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1]옳음과 인내

Author
Irealist
Date
2018-03-12 03:15
Views
370

사람이 옳기는 쉽다. 하지만 그 옳음을 타인에게 관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잔소리, 부부끼리 하는 잔소리, 선생이 제자들에게 하는 잔소리, 대부분이 옳은 소리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하나도 틀린 말은 없다. 부모님이 내게 해준 잔소리, 와이프가 내게 하는 잔소리, 내가 와이프에게 하는 잔소리, 내가 후배들에게 하는 잔소리, 애정이 있고 허물이 없는 사이면 난무하는 것이 바로 이 '옳은 잔소리'다. 그러면 한번쯤 의문을 품어볼만도 하다. 이렇게 옳은 소리가 난무하는데, 우이독경마냥 그 숱한 옳은 소리들이 왜 허공에 흩어져 버릴까? 내가 사실 엄마 잔소리만 잘 들었어도 이제까지 고생도 안했고 훨씬 좋은 위치에 있을텐데, 그리고 지금 와이프의 구구절절 옳은 소리만 잘 들어도 더 건강해지고 더 성공적일텐데. 왜 후배들은 나한테 조언을 구하면서도 내가 구구절절 옳은 소리를 해주면 삼일 반짝 동기부여가 되었다가 예전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갈까. 마찬가지로 나는 왜 좋은 선배의 말씀이나 좋은 TED강연을 들으면 삼일 정도 바짝 동기부여가 되었다가 다시 느슨해져서 예전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갈까.


기본적으로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상대에게 비판으로 받아들여지면 방어적인 태도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혹은 그것이 아니라도 일상적으로 반복되면 그에 익숙해져 버리게 된다. 반대로 너무 일회성 동기부여나 조언이어서는 또 며칠 지나서 잊혀져 버린다. 결국 옳은 말을 통해 상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지나친 반복은 피하면서 일회성으로 그치지는 않으며, 비판적이지 않아 수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처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인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절제와 인내라고 생각한다. 상대에게 다가가는 자신의 행동과 어휘를 컨트롤할 절제, 그리고 바로 변화하지 않는 상대를 참고 견디며 꾸준히 가이드를 할 수 있는 인내. 이 두 가지가 빠진 옳은 말은 잔소리거나 아니면 도덕적인 자기위안과 자기확인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 본인의 마음의 안식과 확인을 위해서하는 이기적인 언행이다. 


그래서 나는 조광조에 대해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본인의 도덕성을 내세워 옳은 소리를 주구장창하는 것은 (사실 그것이 마냥 쉽지는 않지만) 비교적 쉬운 일이다. 본인이 완전무결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타인을 아우를 수 있는 겸손과 그릇, 그것에서 오는 절제와 존중과 인내만이 실제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이제까지 타인을 재단하고 비판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는데, 그것이 그냥 본인의 도덕적, 논리적 우월성을 확인하고 싶어서 해온 일은 아니었는지 반성해 본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그 의미는 옳을지언정 옳은 '말을 하는' 행동 자체는 그릇될 수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마음이 괴로운 굴레에 빠진다. 그런 말을 하는 본인은 스스로 옳은게 확실하니 그 행동을 지속하며 타자를 원망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타인은 그 나름대로 괴롭고 듣기 싫은 것이다. 그러한 괴로운 구업에 빠지게 하는 행위는 말의 표면적 의미가 옳다한들 옳은 행동일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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