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2017 – 2021)

[2018.03.08]켄쇼

Author
Irealist
Date
2018-03-09 10:43
Views
472

주말에 눈폭풍이 왔다. 새로운 집은 거실의 두 면이 창문이라, 꽤나 춥다. 테라스에도 눈이 많이 쌓였다. 지난 달에 디파짓 포함인지는 몰라도 전기비가 30만원이 나왔다. 그래서 와이프도 없고 해서 왠만하면 쌀쌀해도 그냥 지낸다. 그래도 좋은 아파트라 그런지 단열은 잘 된다. 와이프가 임신한 후 새로 발견한 것은 루이보스 라떼다. 물조차 먹으면 토할 정도로 입덧이 심할 때 루이보스 티에 락토스프리 우유를 섞어 마시면 곧잘 마시곤 했다. 그러다보니 나도 어느새 맛이 들렸다. 아몬두 우유와 물을 적당히 섞어서 루이보스 차를 우려내면 설탕을 넣지 않아도 되고 담백하니 맛있다.


회사는 정말로 마음에 든다. 이제까지 인턴까지 합하면 삼성, 유엔, 시카고, 보스턴, 홍콩, 라자드까지해서 벌써 7번째 회사지만, 켄쇼만큼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회사는 없었다. 복지도 굉장히 좋고, 연봉도 높고, 근무시간은 9시부터 5시고, 스타트업으로 시작된 문화라 CEO부터 신입까지 수평한 조직구조이고, 회사 냉장고에는 과일 음료는 물론이고 맥주, 와인, 위스키까지 가득 차 있어서 언제든 마실 수 있다. 휴가일수는 무제한이다. 하는 업무는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데이터로 원하는 프로젝트를 하면 된다. 물론 얼토당토하지 않은 것은 안되지만, 적어도 내가 주체가 되서 프로포즈를 하고, 각자 책임을 지고 일을 진행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을 떠나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팀장님과 팀원들이다. 팀장님은 예전에 교수도 하셨을 정도로 굉장히 능력이 좋으시면서도 수평적으로 팀원들을 진심으로 챙겨주신다. 어떤 프로젝트를 그냥 맡기기보다는 팀원의 미래 목표와 커리어 및 진로 희망 사항까지 상세히 숙지한 후 그쪽으로 계발할 수 있게 프로젝트 등을 맞춤 배정해 주신다. 마음도 따뜻하고, 인덕도 좋으시다. 완벽한 상사이자 멘토다. 팀원들은 10명 중 7명이 예일, 하버드 등에서 물리학, 컴퓨터과학, 응용수학 등의 박사를 한 사람들이다. 매일 한 시간 정도는 각종 세미나와 수업들이 있다. 거의 교수(팀장님)와 포닥(팀원들)들의 연구실 분위기다. 몇년 전, 계속 박사를 가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결혼도 하고 시기도 늦은 감이 있어 아쉬웠던 기억이 있는데, 내가 꿈꾸던 그런 장소다.


너무 자랑만 한 것 같지만, 지금으로부터 불과 2년 전 이맘 때, 정말 매일 비참한 기분에 젖어 있었던 것을 기억하면 이런 글을 한번쯤은 써도 괜찮지 않을까. 그때부터 지지리하게도 계속되던 음울하고 부정적인 기운들을 조금은 걷어낼 수 있지 않을까. 정말 당시엔 계속해서 패배감에 젖은 일기만 썼던 기억이 난다. 2016년 초에 켄쇼와 관련된 기사를 보면서 별나라 세상 같았는데, 드라마틱하게도 그 켄쇼에 입사하게 될 줄은 몰랐다. 고등학교 때 언젠가 월가에서 일하고 싶었었는데, 생각해보니 시카고에서 트레이더는 했지만 월가는 아니었다. 켄쇼는 고등학교 때의 소망도 이루어줬고, 2년 전의 절망도 끝내 주었다.


하지만 아직 문득문득 드는 불안감은 있다. 내가 이렇게 마냥 행복한 것이 익숙하지가 않다. 2007년부터 매해 힘든 일이 있고, 마음 고생이 있고, 사람 고생이 있고 그랬는데 지금처럼 아무런 걱정이 없는 상황이 되니 되려 그것이 불안하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 닥쳐올 불행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불쑥 불쑥 들 때가 있다. 


그래서 하루하루 행복하지만 자만하지 않으려 한다. 사실 우리 팀에 있으면 내 능력부족을 매일 실감해서 자만할 수도 없지만, 정말로 언젠가 불행이 닥쳐올지 몰라 자세를 낮춘다. 흉할 때 물러나 실력을 기르고, 길할 때는 자중하라고 하였다. 내 인생 가장 흉할 때 모든 것을 멈추고 석사를 가서 열심히 실력을 길렀다. 이제 길하니 자중하며 계속해서 열심히 살 차례다. 그래서 언젠가 그 어떤 힘든 일이 이 다음 닥쳐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만들어 놓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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