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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인공지능 투자가 퀀트라는 책의 오해

Author
Irealist
Date
2017-09-16 09:51
Views
1031

요새 미국 트레이딩 업계에 있는 분이 써서 한창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인공지능 투자가 퀀트"라는 책에 내 이야기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ebook을 사서 읽어보니 책 자체는 어려운 주제로 대중성을 확보한 잘 쓴 책이었다. 나와 관련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나왔다.


[(전략)...그렇기 때문에 입사를 위해서는 이전 경력에서 수익률이 괜찮은 알고리즘을 만들었거나 최소한 자신의 시뮬레이션 시스템에서 수익률이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 한다. 시카고 핏 트레이더 경험담으로 유명한 최한철 씨는 자신의 트레이딩 전략을 증명하기 위해 사비 3억여 원을 대출한 후 거래 경험을 쌓으셨다고 한다. 그만큼 실전 거래 경험이 중요하다.]


책의 저자인 권 모씨는 건너건너 서로 이름은 알고 있었고, 가끔 내 블로그에 왔던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일면식도 없는데 떡하니 내 실명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다. 시카고 시절의 내 일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포장해준 것은 고맙지만,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1) 당황스러운 심정이 크고, 2) 이러한 것은 내가 원치 않는 일이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유쾌하지 않다. 저렇게 싣기 전에 짧은 논의라도 해 왔다면 내 의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을텐데,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하지만 이에 관해 나도 느낀 바가 많아 적어 본다.


1. 사실 관계

가장 먼저, 내 트레이딩 전략을 증명하기 위해 사비 3억여 원을 대출했다는 것은 아름답기는 하나 사실이 아니다. 현실은 그것보다 추하다. 과거 시카고에서 썼던 일기들 중에, 누적 손실이 3억을 넘어간다는 이야기를 두 군데 정도 했었는데, 이것이 건너건너 오해를 불러 일으킨 것 같다. 그래서 이를 바로잡고자 정리를 해 본다.


시카고에서 나는 회사에서 사회 초년생치고는 많은 돈을 벌었다. 2011년 7월부터 2014년 10월까지 3년 4개월간,

회사월급+회사보너스+개인옵션트레이딩이익+개인FX트레이딩이익+포커이익 = 한화로 1X억 가량이고,

개인FX트레이딩손실+개인사업투자손실+사기 = 한화로 1X억 가량이다. 그리하여 순손실은 3억 정도다.


회사 월급과 보너스만 해도 충분히 잘 벌고 있었는데, 재단을 빨리 시작하고 싶은 허세에 개인 옵션 트레이딩을 해서 꽤 짭잘한 수익을 벌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 주식시장이 개장한 이외 저녁시간에도 돈을 벌어볼까하는 욕심 때문에 주로 순손실을 입은 부분은 개인FX트레이딩이었다. 옵션 트레이딩은 회사에서 정규 교육을 받고, 기관투자자로서의 노하우도 있었기에 개인 계좌에서도 언제나 이익을 낸 반면, FX트레이딩은 언제나 손실이 났다. FX와의 인연은 학생 시절 중현이에게 6천만원 투자를 받아 다 날려먹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부터 뭔지 모를 보상심리, "본전을 찾고 싶은" 심리, 그리고 오기가 더해졌던 것 같다. 내가 잘하던 것만 하면 되는데, FX투자를 못하면 못할수록 그쪽으로 자금을 더 투입하는 어리석은 연쇄가 반복되었다. 여담으로, FX와 옵션의 결정적 차이는 손절매의 필요 유무에 있다. 나는 언제나 장기 트렌드를 잘 맞추면서도 지나치게 일찍 들어가는 편이었는데, 옵션의 경우 시장이 반대로 움직였다가 돌아와도 권리를 소유만 하고 있으면 된 반면, FX는 손절을 치고 다시 오르는 사태가 비일비재했고, 이런 부분에서 계속 털리지 않았나 싶다.


그 외에도, 유럽 쪽에 했던 투자가 그리스 사태로 인해서 출금도 못하고 어영부영 증발하는 사태, 믿었던 지인에게 몇 천만원 사기를 당하는 사태 등이 더해져서, 3년 남짓한 시간 동안 백만불을 넘게 벌고서도 3억의 누적 손실로 마감을 했다. 그 손실의 상당수를 중현이에게 도움을 받았고, 나머지 부분은 다시 벌어 충당했다. 이것이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거창하게 내 전략을 증명하기 위해 3억을 대출하여 트레이딩을 한 것이 아니라, 허세에, 탐욕에, 조급함에 눈이 멀어 투자가 아닌 도박을 하며 손실을 본 누적액이 3억이다.


2. 공개 블로그의 이유

사실 이 일은 내가 블로그를 공개로 열어두기 때문에 벌어진 연유도 있다고 생각한다.

10대에 내가 이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던 15년 전의 의도는, 나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많이 쓰는 단점이 있으니 내 인생 플랜을 블로그에 떡하니 공개하면 나 스스로가 쪽팔려서라도 열심히 살 것이다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내 나름 심사숙고해서 리쯔메이칸 APU행을 택했지만, 어린 마음에 SKY대 간 친구들에 비해 부끄러운 마음도 많았고, 내가 대구외고에서 모의고사 전교 1등도 했는데 APU를 가는거다, 난 절대 도피유학이 아니다, 그렇게 외치고 싶은 부분도 컸다.

이런 마음은 블로그 개설한지 군대를 가 철이 들면서 많이 옅어졌다. 그 즈음에는 이렇게 일기를 쓰는 습관이 내게 준 놀라운 긍정적 변화들을 체감하고 있었고, 차곡차곡 쌓여가는 일기들을 지나서 봤을 때의 보람에 블로그를 계속했다. 그리고 점점 여러 국가를 다니는 일이 잦을수록,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이 공간은, 내가 진지한 이야기를 해도 낯간지럽지 않은 SNS였다. 내가 이런 장문의 글들을 페이스북에 올린다고 생각을 하면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이런 블로그에 쓰는 것은 그렇지가 않은데, 그것은 아마도 '실시간성'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자면, 인생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를 친구와 맨정신으로 주고받으면 서로 낯간지럽지만, 편지글로 주고받으면 그나마 괜찮은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리고 시카고에서 한국을 4년간 오지 못하면서, 향수병에 걸려 더더욱 외로웠다.

그런데 지난 2년반 전 와이프와 만나고 나서는 외로움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블로그를 쓰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언젠가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룰 때 참여해 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좋은 인연들을 만나기 위함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혹은 네이버 블로그를 사용하면 조회 수는 훨씬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부질없는 일이다. 이렇게 독립된 블로그 사이트를 사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최대 효용은, 정말로 내 인생과 내 목표와 내 글에 관심이 있는 독자만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페이스북 페이지였다면 Like는 더 얻을 수 있겠지만, 내 글들은 독자들이 여가 시간에 수십 개의 포스팅을 뉴스피드에서 스크롤하다가 간간이 읽어보는 정도일 것이다. 그것은 목적성있는 읽기가 아니다. 음식점으로 말하자면 푸드코트를 돌아다니다가 메뉴가 괜찮으면 들르는 수준인 것이다. 대중성을 획득하고 조회 수가 올라갈 수록 독자와의 개인적인 거리는 멀어진다. 홍대 거리 자그마한 재즈 카페에서 수요일 밤마다 연주하는 무명의 피아니스트와 그를 보러 매주 오는 청자와의 관계와, 전국적으로 유명한 가수와 그를 콘서트에서 마주하는 청자와의 관계의 차이 정도 될 것이다. 얕은 다수의 관심보다는, 나와 가치관을 공유하는 소수의 독자들에게 친밀해지는 것이 내게 중요하다. 그런 독자들 중에서야말로, 미래에 어떤 일을 함께 할 수도 있는 그런 귀중한 인연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인연을 맺은 케이스가 몇 번 있었다.

두번째 이유는, 자기만족이다. 벌써 블로그 햇수로 15년째를 맞으면서, 이 블로그와 함께 한 햇수가 내 나이의 절반 가까이가 되었다. 내 온전한 삶과 생각들이 속속들이 스며 있고, 언젠가 내가 꿈을 이뤘을 때 내가 책임지고 있는 커뮤니티의 다음 세대에게 내 스스로의 과거를 온전히 보여주고 싶다. 심지어 내 나르시즘과 조급함, 허세와 자기포장, 불완전성까지 여과없이 드러내고 싶다. 어차피 그 때의 나에게는 까마득한 과거의 글들일 것이고, 흘러간 시간은 지난 어리석음에 대한 최대의 면죄부일 것이다. 만일 내가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 자식들에게라도 좋은 읽을거리이자 좋은 추억거리가 될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3. 지나친 공개가 꺼려지는 이유

위의 이유들로 인해 블로그를 공개로 운영하면서도, 저러한 서적과 같이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 미디어에는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면 등장하고 싶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불특정 다수 속에서는 언제나 소수의 악의가 다수의 선의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선의에는 행동력이 부재한 경우가 많지만 악의에는 행동력이 언제나 내재해 있다. 악의는 그 자체가 감정적 에너지로 승화되지만 선의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디어에 나오는 어떠한 사람에 대해 99%의 사람이 선의를 가지고 있고 1%의 사람이 악의를 가지고 있더라도 언제나 표면에 떠오르는 일들은 1%의 악의를 가진 사람들에 의한 것들이다. 다수의 커져가는 호감과 선의는 부풀어오르고 있는 풍선과도 같아서, 그 대상의 자존감과 위세는 높여줄 지언정 알맹이가 없고,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며, 부들부들하고 두리뭉실한 기분 좋은 솜사탕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다. 하지만 소수의 악의는 바늘과도 같다. 얇고 길어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에 찔리면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그에 더하여, 선의가 악의로 포장하는 경우는 없으나 악의는 언제나 선의를 가장하고 다가서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선의는 악의에 쉽게 전염되지만 악의가 주위의 선의에 쉽게 물드는 경우는 드물다. 20대 중반, 시카고에서 처음 억대의 돈을 만져봤을 때, 트레이더로서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때, 오만하게 이에 대한 티를 내고 다녔다. 세상에는 갖은 희로애락이 존재한다. 천성이 아무리 선한 사람도, 어려운 일을 겪고 있을 때 그런 오만함을 마주하면, 본성으로는 선의를 가진 사람도 악의를 가지고 만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갖은 고통과 쾌락과 욕망과 결핍에 마주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저마다 한두가지씩 구멍을 안고 산다. 인생 자체가 그렇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생은 고단함을 동반한다. 그리고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 그 구멍을 건드리게 되면, 아무리 다른 부분에서 선한 사람도 악의 - 자격지심, 질투, 원한 - 이 뭉게뭉게 일어난다. 그 조건은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경험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르기 때문에 미리 알고 방비하기 힘들다.

어찌되었든 이상이 내가 이와 관련해 생각한 것들이다. 이 해프닝으로 인해서 오랜만에 다양한 생각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이었다. 블로그도, 앞으로 비공개로 전환한다거나 그럴 생각은 없다. 어차피 공개하지 못할 이야기들은 비공개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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