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2017 – 2021)

[2017.09.03]좋은 가장

Author
Irealist
Date
2017-09-04 04:12
Views
420

우습게도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가장이라는 의미를 찾으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명사]

1. 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

2. ‘남편’을 달리 이르는 말.


하지만 가장(家長)은 단지 남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장이 단지 남성 사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듯이, 본래는 성구분없이 한 가정을 이끌어나가는 사람을 일컫는다. 나는 가장이지만, 와이프도 공동의 가장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나의 아들이나 딸도 나와 와이프를 이끄는 가장이 될 수가 있다. 


좋은 가장으로서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예전에는 우리 부모님에 대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들이, 내가 결혼을 하고 보니 다르게 보인다. 그로 인해 우리 부모님이나 장인장모님에 대한 존경심도 한층 높아졌다. 


좋은 가장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결혼 후 지속적으로 생각을 해 보았다. 바람을 피지 않는 것,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하는 것, 보호해주는 것 등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일관성있는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신제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수신과 제가는 별개의 과정이 아니라 무언가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깊게 들어가보기로 하였다.


수신의 최종적 목적은 결국 개인의 지속적인 행복에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의 큰 요소는 욕구 충족이고, 매슬로의 욕구단계설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생리 욕구, 안전 욕구, 애정/소속 욕구, 존중 욕구, 자아실현 욕구의 5단계 욕구가 있다고 한다. 이것을 가족 단계로 확장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가장의 역할 중에 큰 부분은 가족 구성원의 이 다섯 가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있지 않나 싶다. 


1단계는 생리 욕구, 즉 가족 구성원의 의식주 해결이다. 전근대 남성들, 그리고 현대 남성 중 상당수가 이것만이 가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남성 중심사회일수록 낮은 단계의 욕구충족에서 가장의 역할이 멈춘다. 돈 벌어오는 것이 유일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 가족과 시간을 소홀히 하는 것, 바람을 피는 것, 모두 1단계적인 가장의 역할밖에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비단 남성의 문제 뿐만이 아니다. 여성들도 남편을 단지 돈벌어오는 기계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결국은 좋은 가장은 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의 역할에 대한 상호 간의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다.


2단계 안전 욕구는, 단지 신체적 안전뿐만 아니라 경제적 안정, 건강까지 포함하는 부분이다. 직장이 있지만 가정 폭력을 일삼는 남편/부인들은 가장으로서의 의식이 1단계에만 머물 뿐만 아니라, 2단계 욕구를 충족하기는 커녕 역으로 저해하는 위협 요소다. 나는 1, 2단계까지가, 사람이 결혼을 했다면 정말 기본적으로 해야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이 1단계와 2단계까지만 충족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가장의 모습이 된다.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고, 신체적 안전과 건강도 신경쓰니 말이다. 


3단계 애정/소속 욕구는, 단순히 가장의 의무를 충족하는 좋은 가장을 넘어서, 이상적인 가장이 되는 기로를 결정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 애정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정서적인 건강, 그리고 도덕성 발달에 있어 필수적인 부분이다. 


4단계 존중 욕구는 언뜻 보면 3단계와 차이가 미묘할 수 있다. 그러나 예를 들자면, 자녀를 끔찍하게 사랑은 하지만 대학, 전공, 직업, 결혼 선택 등에 있어 가장의 권위를 내세워 자녀의 의견을 묵살하는 가장들은 3단계까지는 충족하되 4단계를 충족하지는 못한다. 어린이에게 부모가 하는 말들은 그 어린이가 성년이 되고 난 후 내적인 마음의 목소리가 된다. 어릴적부터 가정으로부터 자신의 존재와 선택에 관해 타구성원들에게 존중받아온 사람이 나중이 되어 자기 존중을 할 줄을 알고 자존감이 높아진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부모가 애정을 쏟는데도 자식에게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십중팔구 3단계까지는 충족이 되었으나 4단계가 제대로 충족되지 못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이 3, 4단계의 욕구는 어떤 이의 '근본'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에 앞서 '근본'에 대해서 조금 적고자 한다.

이 근본이라 함은 전근대적인 의미에서 '근본 없는 놈'이라고 욕할 때 말하는 가문이나 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20대의 나는 어리석게도 사람을 유년기의 가정 환경에 따라 재단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지극히 유교적인 가풍이 심하고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하는 친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유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근본, 뿌리는 단순히 선천적 핏줄과 유년기의 환경보다 복잡한 개념이다. 한 사람의 자존감의 근원이 되고 버팀목이 되는 가장 흔한 원천이 가정이기는 하지만, 어떤 이가 뿌리 내릴 수 있는 대상은 그에 국한되지 않는다. 새로 만난 사람들, 소속 친구 집단, 혹은 추상적인 개념인 꿈까지도 어떤 사람의 근본을 형성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 고아로 태어나 아무런 거리낌없이 부도덕한 일을 하고 살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개과천선하는 주인공은, '근본'이 없었다가 후에 '근본'이 생긴 케이스다. 반면 아무리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존감이 높게 형성되어 사회로 나오더라도, 점점 본인의 욕구와 쾌락을 좇으며 스스로의 스탠더드를 낮춰가는 사람은 '근본'이 있다가 후에 '근본'없는 인간으로 전락한 케이스다. 또한, 사람과의 관계만이 '근본'을 형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일생 애정을 주고받을 대상이 없는 사람도, 본인이 새로이 찾은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미래에 강력히 원하는 꿈을 발견하고, 이 꿈을 항시 마음에 지니고 의식하며 행동하게 된다면 이 꿈은 그 사람을 '근본'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이처럼 근본은 가변적인 개념이다.


주제에서 잠시 벗어났는데, 어찌되었든 근본은 가변적인 개념이지만 가정에서 3, 4단계의 욕구가 얼마나 충족되느냐가 어떤 이의 시작점을 크게 변동시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시작점을 본인이 후천적으로 변화시키는 데에는 많이 자기반성과 사색을 요한다. 따라서 영어를 조기교육시켜서 남들보다 언어면에서 시작점을 높게 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처럼, 가장은 구성원의 뿌리 형성에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 


5단계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는 구성원의 천분과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인생을 성취해 나가게 해주는 부분이다. 이 단계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가장으로서 중요한 것은 계획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자아실현이라는 것이 개인 차원에서도 힘든데, 가정 차원에서 행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가장 쉽게 행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선택을 강요하지 않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부모들은 애정이 너무 과하다. 공부를 강요하고, 대학을 강요하고, 직업을 강요하고, 심지어 결혼마저 강요한다. 이는 단순히 독선에 다름아니다. 옳은 가장의 역할은 본인이 생각할 때의 '최선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 다수의 선택지'를 구성원에게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단순히 욕구의 충족이 훌륭한 가장의 역할일까? 혹은, 단순한 욕구의 충족이 훌륭한 인생을 만들어 줄까? 애초에 수신이라 함은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다는 뜻이다. 욕구의 충족의 정반대에 있는 의미다. 이를 미루어보면 결국은 중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욕구를 충족하되 지나침이 없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목표로 해야하는 이상향이다. 1단계 생리적 욕구, 식욕을 충족하되 그것이 지나치면 비만을 통해 건강을 해치고 이는 결국 2단계 안전 욕구의 저해를 불러온다. 생리적 욕구 중 하나인 성욕을 충족하되 그것이 지나쳐 혼외로 미치게 되면 애정/소속 욕구가 침해당한다. 3단계 애정/소속 욕구가 지나치게 되면 과한 학부모가 되어 자녀의 4, 5단계 욕구를 침해하게 된다.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 혹은 4단계 존중 욕구만 지나치게 강해 이루지 못하는 꿈만 좇는 가장은 구성원에게 정말 기본적인 1, 2단계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개인 차원에서의 중용이 집단 차원에서는 조화가 된다. 이 조화는 비단 각기 다른 욕구들 간의 조화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 간의 조화에도 해당이 된다. 시간을 포함한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모든 구성원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켜주는 것이 불가능할 수가 있다. 맏이가 미국 유학을 너무나 가고 싶은데, 학비로 인해 둘째까지 미국 유학은 보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부인은 자식들과 오손도손 같은 도시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자식들은 자아실현을 위해 국외로 나가고 싶어하는 경우가 있다. 각기 다른 단계의 욕구들 간의 충돌도 있지만, 어떤 한 단계의 욕구 레벨에서도 구성원 사이 충돌은 일어난다. 이 부분은 수학에서 말하는 최적화(Optimization) 문제이기도 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이 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수신과 제가가 아닐까 싶다. 개인이 직장에서 성공하거나, 돈을 많이 버는 문제는 일차원적인 단순한 문제다. 능력과 노력, 그리고 조금의 운이 있으면 된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다차원적이고 복잡한 난제다. 그래서 어떤 이의 일생에서, 훌륭한 가정을 꾸렸다는 사실 자체는 그 사람의 굉장히 위대한 업적이고 자부심을 가질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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