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2017 – 2021)

[2017.08.10]불운의 상흔

Author
Irealist
Date
2017-08-11 07:25
Views
413

1. 

인생은 갖가지 기쁨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절대적인 기준에서는 어떤 이가 타인보다 고요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에게도 그 나름의 고통과 행복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본인의 인생의 나락을 일찍이 경험해보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그러한 경험만이 사람들을, 무엇보다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절실히 알게 해 준다. 그러나 거기에 다만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그것들은 상흔을 낳는다.


지난 월요일 회사 퇴근 길 지하철에서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불이 꺼진 어둠 속에서 기차가 달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드문드문 있었는데, 대부분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다. 나름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나는 조용히 창문을 응시했다. 스마트폰이 놓치게 만드는 일상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급작스럽게 우울감이 찾아왔다. 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두운 전철 안으로 듬성듬성 비치는 노란 불빛이 그렇게 가슴이 답답할 수가 없었다. 과거의 기억들은 불현듯 떠오른다. 2014년 초, 금전적 손실이 억대를 넘었을 때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나는 내가 운동이 부족해서 심장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심장과 폐 검사도 했었다. 나중에서야 나는 그것이 공황장애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의식하고 숨을 쉬지 않으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사실 작년까지도 간헐적으로 찾아왔다. 답답했다. 길을 잘못 든 것만 같을 때마다, 과거를 후회할 때마다, 아니면 이유없이 찾아오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올해 들어서는 그런 경험을 크게 하지 못했다. 모든 것들이 안정되어 가고 있다. 내 삶도, 결혼 생활도, 진로도, 다시 가닥을 잡고 새 출발을 하려 한다. 하지만 그 즈음에서 또 생각지 못한 상흔을 발견했다. 안정됨에 대한 우울감이 자꾸만 찾아온 것이다. 내게 정신적 문제가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현재가 행복하고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에 만족하지를 못했다. 나는 어느샌가 고통에, 그리고 그런 고통 속에서만 도취할 수 있는 비운의 주인공과도 같은 나르시즘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일까. 모르겠다. 이러한 문제는 비극의 잔상으로 내게 다가왔다. 겨울 동안, 자꾸만 여러 가지 사건사고에 대한 상상을 하고야 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언제나 그럴때면 머리를 흔들고 벗어나려 하고, 나는 잠재 의식과 사고가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 사람이기에, 좋은 생각도 그만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이에 집착하면 할수록, 비극적 상상과 그를 상쇄하려는 나의 노력은 습관이 되어만 갔다. 이러한 증상은 여름을 지나며, 유럽을 다녀와서야 많이 나아졌다.



2. 

본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면 타인에게는 그만한 흥미거리가 없다. 그러나 진지하게 본인의 고통에 대해 하소연하는 것이 반복되면 그 사람은 기피대상이 되고, 그것에 대해 교훈삼으며 자부심을 가지면 꼰대가 된다. 지금의 나는 아마도 꼰대다. 나름의 힘든 일들을 반복해서 매해 겪은 것에, 내 특유의 나르시즘이 더해지고, 거기에 우울감까지 가미되었다. 20대 초중반의 나는 나르시즘과 중2병은 지금보다 심했지만 그때는 낙관이 있었다. 재치가 있었다. 잠재적 독자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유머 감각도 없다. 시종 일관 진지어투다. 글이 재미있을 리가 없다. 본인도 그것을 알기에 일기를 자주 쓰지 않는 것일수도 있겠다.


일기는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다 문제는 이러한 성향이 대인 관계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친구들과 있으면 즐거웠다. 장난도 많이 쳤다. 입담도 나름 있었다. 나도 친구들을 좋아하고 친구들도 나를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재미가 없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재미가 없고, 상대가 재미없어 하는 것도 느껴진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집중력도 저하되었다. 산만하다. 나이 어린 후배들을 만나면 내 예전 이야기을 하던가 가르치고 조언을 하려고만 든다. 꼰대다. 그리고 했던 이야기를 반복한다. 최악이다.



3.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내가 문제를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면 꼰대라고 바로 위에 써 놓고서, 또 이렇게 과거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만, 앞으로 시간을 가지고 내 마음 속에 담아둔 일들, 지난 15년 가량을 차곡차곡 정리해 보려 한다. 그 과정에서 고마웠던 사람도 정리해보고, 미웠던 사람도 정리해보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용서하고 싶다. 

Total 0

Total 175
Number Title Author Date Votes Views
Notice
[공지]뉴욕 재학 및 재직 중 블로그 글입니다
Irealist | 2016.09.11 | Votes 0 | Views 7547
Irealist 2016.09.11 0 7547
39
[2017.09.22]면접
Irealist | 2017.09.23 | Votes 0 | Views 606
Irealist 2017.09.23 0 606
38
[2017.09.15]인공지능 투자가 퀀트라는 책의 오해
Irealist | 2017.09.16 | Votes 0 | Views 1031
Irealist 2017.09.16 0 1031
37
[2017.09.09]의지
Irealist | 2017.09.09 | Votes 0 | Views 490
Irealist 2017.09.09 0 490
36
[2017.09.04]석사 마지막 학기
Irealist | 2017.09.05 | Votes 0 | Views 472
Irealist 2017.09.05 0 472
35
[2017.09.03]좋은 가장
Irealist | 2017.09.04 | Votes 0 | Views 420
Irealist 2017.09.04 0 420
34
[2017.08.10]새로운 시작
Irealist | 2017.08.12 | Votes 0 | Views 300
Irealist 2017.08.12 0 300
33
[2017.08.10]불운의 상흔
Irealist | 2017.08.11 | Votes 0 | Views 413
Irealist 2017.08.11 0 413
32
[2017.07.14]5월 스위스 이태리 여행기
Irealist | 2017.07.14 | Votes 0 | Views 324
Irealist 2017.07.14 0 324
31
[2017.06.04]죽음 이후의 삶
Irealist | 2017.06.05 | Votes 0 | Views 491
Irealist 2017.06.05 0 491
30
[2017.05.11]학기의 마무리
Irealist | 2017.05.27 | Votes 0 | Views 403
Irealist 2017.05.27 0 403
29
[2017.04.23]인연
Irealist | 2017.04.24 | Votes 0 | Views 438
Irealist 2017.04.24 0 438
28
[2017.04.16]행복
Irealist | 2017.04.16 | Votes 0 | Views 381
Irealist 2017.04.16 0 381
27
[2017.04.10]관계의 낭만화
Irealist | 2017.04.11 | Votes 0 | Views 408
Irealist 2017.04.11 0 408
26
[2017.03.06]나의 정치관
Irealist | 2017.03.06 | Votes 0 | Views 523
Irealist 2017.03.06 0 523
25
[2017.02.19]금식
Irealist | 2017.02.20 | Votes 0 | Views 476
Irealist 2017.02.20 0 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