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2017 – 2021)

[2017.04.10]관계의 낭만화

Author
Irealist
Date
2017-04-11 03:17
Views
408

돌이켜보면 대구외고 시절의 학생들은 정말로 순수했다. 아직도 만나보면 그렇다. 다른 고교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분히 정치적인 학생들도 있고, 술담배, 성적인 것에 일찍 눈을 뜨는 학생들도 많은 것 같은데, 대구외고에서는 적어도 내가 보이는 시야 내에서는 그런 경우가 전혀 없었다. 아주 따뜻한 학교였다. 요즘도 대구외고 시절 선생님들은 찾아뵈면, 선생님들조차 당시 대구외고가 매우 특별했다고 하신다.


나는 고교 졸업 직후, 20세부터 줄곧 해외를 다녔다. 그래도 일년에 한 번은 한국에 와서 친구들을 만났지만, 20대 중반부터는 각종 실패와 빚 때문에 한국을 4년간 들어가지 못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내가 현실보다 훨씬 더 나의 옛 친구들과의 관계를 낭만화했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내가 겪던 어려움과 향수도 그것을 증폭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20대 중반은 아마도 사람이 학창 시절의 순수함을 가장 많이 떨쳐내는 시기일 것이다. 군대에 다녀오고, 취업 준비를 하며, 동기와 친구들보다는 본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아진다. 학창 시절의 순수를 빠르게 떨쳐내게 해 주는 촉매제로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현 사회의 20대 중후반은 모두가 두렵고 불안하다. 이런 시기에 나는 한국의 친구들과 격리되어 있으면서 나 혼자만의 세계에 몰두했다. 시카고에서 주로 만났던 친구들, 정욱이나 에디, 태윤이 같은 아이들은 특별히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이어서, 내가 낭만화된 옛 관계들에 대한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이 더욱더 늦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 때문에 2015년 한국으로 4년 만에 돌아가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알 수 없는 그늘이 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너무나 사람들이 반가웠고, 사람들도 너무나 반가워 했다. 그러나 내가 환상 속에서 찾던 예전의 그 무언가는 결핍되어 있었다. 사회의 탓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이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던 친구가 매춘과 유흥에 젖어 있는 경우도 있었고, 이전에는 가슴 깊이 신뢰하던 사이였는데 더 이상 나와의 대화에 진실함이 없단게 절실히 느껴지는 사람도 있었다. 진심으로 서로 좋아하고 격려하던 관계였는데 일종의 질투와 경쟁심으로 점철된 관계로 전락했단 걸 느낀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의 뒤로, 가장 슬펐던 것은 바로 그들과의 대면에서 거울처럼 비쳤던 나 자신을 마주했을 때였다. 나는 고교 시절이나 20대 초반에도 나르시즘이 너무나 강하고 독선적이어서, 그렇게 밥맛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진심으로 친구들이 너무나 좋았다. 그리고 나의 친구면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냈다. 친구들도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조금 밥맛없는 구석이 있더라도 내게 깊은 우정을 보내주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와 마주한 나 자신은, 과거의 단점은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장점만 사라진 사람이었다. 시카고에서 트레이더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면서, 나르시즘은 더 고약해졌다. 어떤 주장을 할 때 굉장히 독선적으로, 내가 옳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리고 같은 이야기를 몇 번씩 반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믿지 않았다. 보스턴에서 그 교수에게 데인 직후여서 그랬을까. 사람을 믿지 않고, 관찰을 했다. 그리고 그 관찰을 통해 흠을 보던지, 사람을 재단했다. 나르시즘과 독선적인 부분과 일관되게, 상대에 대해 판단하고 내가 옳음을 관철했다.


이런 부분들을 돌이켜보면, 관계 자체가 정말로 진실되고 순수했다가 이후에 거짓되게 변질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타인들은 그곳에 그대로 오롯이 있었고, 단지 나 홀로 심성이 이렇게 변했다가 저렇게 변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사람들이 좋았고, 그들을 신뢰했는데, 그것은 내가 그들의 좋은 면만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세상에 대해 낙관적이고 좋은 경험만 했어서이다.


여기서 다시 내가 얼마나 군대에서, 시카고에서, 보스턴에서, 홍콩에서 고생했음을 주절거리면서, 환경 탓을 하며 나 자신을 합리화하긴 싫다. 20대 중반 이후가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힘들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오히려 힘든 상황에서 더욱더 진실된 우정을 꽃피우고, 사람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좋은 이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저렇게 변했던 것은 내 스스로의 결함 때문이고, 나의 그릇이 작았기 때문이었다. 자존감이 지나치게 높아 나르시즘으로 흘렀던 부분은 내게 많은 이점을 주기도 했지만, 한 발 잘못 디딘 순간 독선적이고,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는 사람으로 변해버릴 위험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었다. 환경과 이벤트들은 단순히 트리거 역할에 불과하다.


다행히도 다시 학교로 돌아와 일년 남짓 지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좋은 사람과 결혼도 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 내 마음이 씻겨가는 것을 느낀다. 마음에 여유도 생겼다. 이전과 같이 쫓기지 않고, 이전과 같이 불안하지도 않다. 어떤 사람이 잘못을 하면, 마음 속에서 흠잡고 판단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라는 생각을 한다. 우스운 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거의 평생 처음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 패턴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래도 아직 나는 계속 성장하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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