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2017 – 2021)

[2020.01.20]하기 싫은 일

Author
Irealist
Date
2020-01-20 21:38
Views
854

1.

수신제가라는 말에서의 수신이란 것이, 거창하게 도를 닦거나 수양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신이란 그저 "본인이 하기 싫은 일을 할 줄 알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을 줄 아는 것"에 불과하다. 실은 그렇게 단순한 것인데도,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하기 싫은" 일이니까 하기 힘들고, "하고 싶은" 일이니까 하지 않기 힘들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생 수신조차 못한 채로 인생을 마친다. 건강이 나빠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술과 고기를 즐겨한다. 하고 싶은 일이니까. 시간 낭비인 줄 알면서도 게임을 끊지 못한다. 하고 싶은 일이니까. 매일 운동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운동하지 않는다. 하기 싫은 일이니까. 해야하지만 하기 싫은 일, 하면 안되지만 하고싶은 일. 그것만 조절이 된다면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능히 천하도 평정할 수 있다는 것은 과언이 아니다.

와이프와 임신출산 전에는 3년간 단 한번도 싸운 적이 없다. 육아하면서는 한동안은 하루가 멀다하고 싸웠다. 표면적인 이유는 다양하다. 주방 정리 때문에, 육아 방식 때문에, 돈 씀씀이 때문에, 주말을 보내는 방식 때문에.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저 둘다 수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다. 부부싸움이란 것은 상대의 행동이나 사고 방식 중에서 마음에 안들고 바꾸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물론 상대가 싫고 혐오스러워서 싸우는 것은 그냥 이혼해야 하는 것이고. 사랑하는데 싸울 경우에는 그렇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내 자신의 행동이나 습관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는가? 바꾸고 싶은 것이 없는가? 당연히 많다. 그런데 하나라도 제대로 바꾸는데 성공한 적이 있는가? 새해마다 다짐을 해 놓고 삼일이상 간 적이 있는가? 생각하면 없다. 결국 나 스스로도 변화하지 못한 주제에 상대는 변화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2.

결혼한 남자들은 "절대 결혼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농담반 진담반으로 미혼의 남자 후배들에게 말하고는 한다. 나도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그런 이야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20대 때는 남자들이 성욕이 왕성해서 좀 괜찮은 여자들과 사겨보려고 돈, 시간, 애정 공세를 하지만, 30대가 되면 예전처럼 여자에 죽고 못살지도 않고 경제적 여유가 생겨서 취미 생활도 돈을 들여서 즐길 수가 있는데, 굳이 결혼이라는 시스템에 갇혀서 그 자유를 잃고 져야 할 책무만 늘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 그 요지다. 그러나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말 극단적인 케이스로 연예인 서 모씨 같은 쓰레기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 비슷한 사람들끼리 결혼하였을 경우, 결혼은 가치중립적이다. 즉, 결혼 그 자체로는 어떤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해주지도, 더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다만, 결혼은 본인의 수신 정도를 시험대에 올리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결혼이 그저 불이익일 뿐이라는 착각을 하곤 하는 것이다.

수신을 하지 않으면 커리어든 건강 문제든 필히 후회할 일이 생긴다. 그런데 미혼일 때는 수신이 되지 않더라도 그 후폭풍은 미래의 내가 짊어질 뿐이므로 '후회'라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 하지만 배우자가 있을 경우에는 수신이 되지 않으면 그 후폭풍의 여파를 어느 선까지는 공유하게 되기 때문에 서로 간에 갈등이 생기게 되고 상대를 탓하게 된다. 헌데 나는 와이프와 아기를 낫기 전까지는 3년간 한번도 싸운 적이 없지 않은가? 그건 와이프와 내가 둘다 수신이 되었기 때문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다만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1) 수신이 되지 않는 문제들이 결과로 오는 시간대는 너무나도 먼 미래이고, 2)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아직까지는 대부분 각자가 져야 했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내가 수신이 되지 않아 운동을 하지 않고 건강을 돌보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와이프 입장에서는 1) 30대엔 본인의 노후 건강 문제도 실감이 잘 안나는데 배우자의 노후 건강 문제까지 실감하기란 쉽지 않고, 2) 노후에 내가 아프더라도 결국 내가 아픈 것이지 와이프가 아픈 것은 아니다. 간밤에 술을 먹고 다음날 골골대더라도 그것이 와이프에게 당장 미치는 영향은 크게 없다. 그러니 사랑하니까 잔소리를 하긴 하지만 그 잔소리를 현재의 갈등을 만들어낼 정도로까지 확대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기를 낳으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상대의 수신 문제가 1) 먼 미래가 아닌 당장 자식의 교육에 영향을 미치고, 2) 본인에게까지 여파가 크게 미친다. 예를 들어 똑같은 건강 문제의 경우, 간밤에 술을 먹고 골골대면 아기에게 좋은 본보기도 아니지만 안그래도 힘든 육아에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게 된다. 집안일을 하고 있으면 아기와 좀 놀아주기라도 했으면 싶은데 누워서 골골대고 있으면 화딱지가 나는 것이다. 그런 것들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싸움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넘어서게 되는 시점부터는, 싸워서라도 나의 수신이 되지 않는 문제를 고치려고 들게 된다.


3.

그러다 아기가 슬슬 말하기 시작하고 동물의 형상에서 인간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정상적인 인간들은 정신을 차리고 강제 수신을 하게 된다. 생전 일찍 일어나는 일이 없던 와이프도 아기를 위해서라면 새벽같이 일어나 이유식을 준비하게 되고, 생전에 밖에 나다니지 않던 나도 주말마다 아기에게 뭘 보여주겠다고 산으로 뮤지엄으로 수영장으로 쏘아다니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아기를 키우는 것이 힘든 이유는 육체적으로도 지치고 정신적으로도 피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신, 즉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되고,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물론 미혼자도 다른 경험을 통해 수신을 달성하기도 한다. 수신을 극단까지 달성한 예로는 예수가 있고, 석가모니도 라훌라라는 자식이 있긴 했지만 출가 전의 자식이니 육아를 통해 수신을 달성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일반적인 인간들이 수신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의 극단적인 강제력이 필요하기 마련이고,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부성애와 모성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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