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2017 – 2021)

[2019.12.26]홍콩에서 있었던 일 - 9: 자금

Author
Irealist
Date
2019-12-26 20:39
Views
423

9.

홍콩법인에 들어올 자금을 기다리는 동안, 그래도 홍콩 팀원끼리 나름 재미나게 시간을 보냈다. 우리끼리 바베큐도 했고, 술자리도 가졌으며, 여러 모로 친목을 다졌다. 홍콩 팀원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조직의 미래와 리더십이 불투명할 때, 폐쇄된 작은 조직 내에서 구성원들이 서로 어떤 식으로 헐뜯고 무너져 가는지 몇 번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런 경험에 비하면 홍콩의 팀원들 - Y팀장, J수석, S사원 - 은 모두 인격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와중에, 다른 펀드 매니저들과 술도 마시고 전략 공유 같은 것도 하라는 Z대표의 말에 내가 갈등을 빚자, Z대표는 우리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던 J수석에게 그런 역할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J수석도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까지 학계에만 있던 사람이었고 유흥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만 받을 뿐이었다. Y팀장도 마찬가지로 유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홍콩으로 파견되어 나온 사람은 다름아닌 K차장이었다.

K차장은 앞서 나왔듯이 M투자자문에서 면접을 볼 때 여기 이상하다고 오지 말라고 내게 말했으며, 나중에 Z대표와 면접 겸 호텔 바에서 봤을 때 술 마시고 넥타이를 머리에 두르고 노래부르다 인사불성이 되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K차장은 다른 홍콩 팀원들과는 달리 유흥을 매우 좋아했고, 내가 좋아하는 인간상과는 많이 멀었다. 그는 홍콩에 있는 동안 많은 일을 저질렀고, 그 중 몇몇은 내가 뒷수습을 해야 했다. 그는 본인의 가족에게도 잘못을 했고, 우리 팀원들과 회사, 그리고 Z대표에게도 잘못을 했다. 하지만 이제와서 일일이 그의 허물을 묘사해서 무엇하랴 싶다. 내부자 거래나 룸살롱 사건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내가 성숙해지는 재료를 제공해 주었고 지금도 생각거리를 주기 때문에 디테일하게 묘사했지만, K차장과의 일들은 그저 내게 있어 지나가는 해프닝일 뿐이었다. 그래서 굳이 디테일로 들어가진 않는다. 그저 그는 많은 '잘못'들을 했다. 그럼에도 K차장을 보고 있으면 그가 악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딘가 어리숙하고 불쌍해 보이는 인상도 있었다. 잔머리를 열심히 굴리는데 그게 남들은 다 보이는, 그런 어리숙함이 있었고 천진난만함이 있었다. 그는 그저 작은 인간이었다. 어떤 흐름이 있으면 그 흐름이 어디로 가는지, 그 흐름에 몸을 내맡겨도 될지 생각하고 고민하기보다는, 그저 그 흐름에 휩쓸려버리는 그런 사람일 뿐이었다. 그래도 K차장이 온 이후, 기존의 홍콩 팀원들이 그에 대한 거부감으로 더욱더 결속이 강해지고 똘똘 뭉치게 되었다는 장점 또한 있었다.

그렇게 지내던 차에 2억 정도가 싱가폴에서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어느 오후 Z대표에게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지금 2억을 홍콩지부로 송금하려는데 Y팀장 계좌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Y팀장이 곤란해하면서 내게 부탁을 하였는데, 출처도 잘 모르는 현금 2억을 내 계좌로 받는다는 것이 너무 찝찝해서 거절했다. 그랬더니 Z대표에게 전화가 직접 오더니, 어려울 때 서로 돕자는 취지의 말을 장황하게 뭐라뭐라 가더니 보낸다고 끊었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빡이 쳐서 "에라이 씨팔 장난하나!"라며 책상을 주먹으로 있는 힘껏 두들겼고, 팀원들은 모두가 놀랐다. 출처도 불분명했고, Y팀장의 계좌로 보내지 못한다는 것도 석연치 않았고, 막무가내인 Z대표의 태도에도 열이 받았다. 아무리 내 무의식 속에 어른 앞에서 공손한 유교 문화가 잠재해 있다고 해도 시카고에서 트레이딩할 때 다 버려놓은 성격은 아직 정화가 되지 않았단 말이야. 나의 그런 행동에 놀란 Y팀장은 다음날 함께 은행에 가서 내 통장에 입금된 돈을 그의 통장에 옮겨 주었고, 나는 그런 일련의 과정과 내가 연관되지 않았다는 증거들을 확보해서 저장해 두었다. 이후에 Z대표가 싱가폴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는 M대표와 함께 홍콩에 와서 그를 소개해 주었는데, 자금의 출처가 바로 M대표였다. 굉장히 좋은 인상의 M대표 앞에서 Z대표는, 우리 최 팀장이 자금에 대해 조금 불안해했다면서 농담을 던졌고, M대표는 자기는 절대로 그런 이상한 사람 아니라고 웃으면서 해명했다. 그게 뭔 상관이란 말인가. 어디서 오는지 모를 돈이 내 계좌를 거쳐 어딘지 모를 곳으로 흘러가는데 내가 그걸 좌시했다가 어떤 꼴을 당할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시카고 트레이딩 시절이 그리웠다. 아무리 스트레스 받았어도, 합.법.적.인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한 일인줄 몰랐다.

결국 그 2억도 우리 홍콩지부의 자금으로는 들어오지 못한 채 어디론가 흘러갔고, 시간은 또 흘러갔다. 처음 이 회사 면접을 볼 때, 주요 투자자들은 테마섹, 아부다비투자청과 같은 국부펀드와 글로벌 연기금들이라고 소개하며 Z대표 얼굴까지 대문짝하게 실어놓은 국내 대형 신문사의 기사와는 달리, 고작 2억 가지고 받니 마니하는 이 따위 상황이 너무나 처량했다. 소소하게 천만원 정도씩 들어오는 일이 한두번 있었는데, 그 액수로는 정말 증거금도 하기 힘들어서 레버리지를 최대한 올려서 돌려보았으나 잘 될 리가 없었다. 시카고에서 옵션 트레이딩할 때 우리 팀의 마진만 해도 2500억이었는데. 무슨 진짜 소꿉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Z대표에게서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말을 열 번 정도 더 들은 후에, 드디어 Z대표가 런던의 A사 투자자들과 함께 홍콩지부를 방문할 일정을 잡았다. 그 방문과 함께 홍콩지부 자금도 전달하기로 되어 있었다. 투자자들과 Z대표가 도착한 첫날에 마카오에서 관광이 예정되어 있었고, 둘째날 홍콩사무실에서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카오에서, 내가 홍콩에서 겪었던 일 중 최악의 사태가 터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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