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2017 – 2021)

[2020.01.01]새해

Author
Irealist
Date
2020-01-01 17:15
Views
548

새해를 맞아 와이프와 아기와 누나와 함께 몬탁 등대에 다녀왔다. 몬탁 등대는 롱 아일랜드 동쪽 끝자락에 있어서 이 일대에서는 일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다. 아쉽게도 구름이 조금 끼어 있어 수평선에서의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새해 첫 날을 일찍 일어나 보람있게 보내니 좋았다. 새해라고 해서 희망차다거나 새롭다던가 그런 느낌은 사실 느껴본지가 오래되었다. 그저 뭔가를 매듭짓고 뭔가를 시작하기에 적절한 시기라는 생각을 한다.

올해는 일기를 좀더 신경써서 자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최근에 일기가 왜 도움되는지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느낀 바가 있다. 20대 중반까지의 나의 나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 일관되는 바가 있었다. 내게는 특유의 자기애와 자존감의 도움을 입어 구현한, 내가 바라보는 나 자신의 상이 어느 정도 명확하게 있었다. 그렇게도 선명한 윤곽을 그릴 수 있었던 것에는 타인을 재단하는 오만함과 미래에 잡아놓은 계획과 목표가 큰 일조를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0대 중후반 이후부터는 나에게서 이제까지 발견하지 못한 점들을 많이 발견했고,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던 상이 얼마나 어긋나 있었던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되는데는 내 내면의 욕망을 가감없이 마주해야 했던 몇몇 순간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20대 중반 이후 거의 10년 가까이되는 시간에 걸친 발견과 재발견의 여정 속에서, 숱한 나들을 만났다. 순수한 나, 욕망에 불타는 나, 도덕적인 나, 부정한 나, 타인을 재단하는 나, 스스로를 반성하는 나, 피상적인 나, 현학적인 나,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 그러한 나의 여러 면면들은 여기저기에 써둔 일기들 속에 기록되어 왔고, 그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어느 새부터 또 하나의 새로운 나 - 객관성을 갖춘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객관성조차도 어디까지나 내 주관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다양한 나 속에서는 가장 객관적인 내가 긴 시간에 걸쳐 일기들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생각을 적어 내려가는 패턴이라던가 문체로 그 성질이 정의되는 객관적인 나는 이 블로그에 상주하게 되었고, 그 나는 현실 세계에서 행동하고 생각하는 소위 말하는 "진짜" 나보다도 나의 본질을 더 잘 알고 있게 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 블로그에 객관성을 갖춘 내가 상주하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여기에 써 내려가는 글, 혹은 내가 써 내려가는 글에 투영되는 내가 객관적으로 서술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객관성을 갖춘 나는 블로그와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상호 작용을 할 때, 그러한 나를 관찰하고 나름의 사유를 내놓는 단편적인 조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지만, 행동하는 내가 그 사유를 블로그의 글로 서술하는 과정에서는 숱하게 많은 다른 나들이 개입하여 그 사유 위에 다양한 덧칠을 해 나간다. 아직까지도 타인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쓰는 나, 가감없는 진실만을 남기길 원하는 나, 내가 생각하는 객체에 대한 갖가지 감정에 의해 나 자신만의 버전의 사실만을 남기길 원하는 나, 그러한 고민들까지도 남겨놓아야한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나. 그렇기에 내가 쓰는 글들은 무엇 하나 완전하게 객관적인 글은 없다.

그럼에도 객관성을 갖춘 나의 존재를 이제는 조금은 머릿 속에서나마 추상적으로 느낄 수가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또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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