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2017 – 2021)

[2019.08.27]홍콩에서 있었던 일 - 7: 면담

Author
Irealist
Date
2019-08-27 21:31
Views
846

7.

홍콩의 여름의 막바지 즈음, Y팀장이 홍콩지부 소속임에도 나 몰래 한국 주식거래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심증과, 이쪽의 동태를 Z대표에게 보고하고 있다는 심증이 확신으로 굳어져 갔다. 그러다 '대표님이 트레이딩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다'라고 말한 것이 (Y팀장을 통해) Z대표의 귀에 들어가서 그가 내게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있고 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겠다고 생각을 하여 Z대표에게 나는 여러 모로 Y팀장을 신뢰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전달했다. 그런데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Z대표의 반응은 격렬했다. 전화로 내게 거의 한 시간 동안 Y팀장을 변호하면서 나에 대해서는 뭐가 그리 잘났냐는 식의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내가 아직 이 회사에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던, 부산에서 한 달 지내던 시절에, Y팀장에게 Z대표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때 Y팀장은 본인도 잘은 모르겠지만 IPO투자 쪽으로는 업계에서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고 했었다. 그 말로 미루어 봤을 때 두 사람은 그렇게 친하거나 잘 아는 사이같지는 않았는데, 뭔가 이상했다.

결국 Z대표는 나를 한국으로 소환했다. 강남의 W호텔인가 엄청 고급진 호텔에서 B이사와 셋이서 보자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둘을 마주하기 전에 혼자 호텔방에서 기다리면서 엄청나게 긴장을 했었다. 나보다 어른인 사람에게 당당하지 못한 것은 유교적인 가치관으로 키워진 내 유년기의 부작용인가 싶었다. 그래도 할 것은 해야지, 휴대폰에 녹음 앱을 다운받았다. 녹취에 관한 법률은 미국에서는 주별로 상이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주에서는 쌍방의 합의하에만 녹취가 합법이지만, 어떤 주에서는 한쪽의 동의로도 합법이다. 즉, 본인만 동의하면 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후자라서, 내가 대화 당사자의 경우에는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합법적으로 녹취를 할 수 있으며, 법정에서 증거 자료로 유효하다. 녹음 기능을 틀어두었다. 녹음 기능을 튼 또다른 이유는, 아무리 미국에서 트레이딩하다 왔다고 하지만 새파랗게 젊은 나를 홍콩지부장으로 앉힌 것이 너무나 석연치 않았는데, 혹시 바지 사장같은 존재로 뭔가 뒤집어 씌우려고 그런건가하는 의심도 있었다.

곧 둘이 들어왔다. Z대표는 나의 맞은 편에 앉아 대면을 하고 덩치 큰 B이사는 고압적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자세로 비스듬히 있었다. 아마 Z대표가 분위기 좀 내라고 했으리라 짐작했다. 그 뒤 거의 장장 두 시간 가량 (실제는 더 짧을 수도 있는데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이야기를 나눴고, 중간에 Z대표는 B이사에게 나가라고 했다. 첫번째 요지는 Y팀장이 정말 좋은 사람이고 한철 씨 칭찬을 엄청했다, 한철 씨가 홍콩팀장 된 것도 Y팀장의 강력한 추천이었다는 이야기. 두번째는 내부자 거래에 관련한 것. 나는 그냥 대놓고 물어봤다. 혹시 내부자 거래하시냐고. 나는 그런 것 하지 않는다고. Y팀장이 그런다면 같이 일 못한다고. Z대표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아니 뭘 그런 것을 하냐고. 그리고 내가 금감원에 국회 관련 자료도 준비해주는 사람인데 무슨 지금 금감원 걱정을 하냐고. 어찌되었든 Z대표는 강력히 부인하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데 내가 더 이상 어찌할 여지는 없었다. 그의 4차원 화술에 한번 더 휘둘린 뒤, 마지막엔 이 호텔 한철 씨를 위해 준비했으니 여자친구 부르던지 잘 즐기다 가라고 하며 떠나고 나는 우두커니 방에 남게 되었다. 언제나처럼 어안이 벙벙한데, 해결된 것 같으면서도 찝찝한 기분이었다.

인간 관계가 찝찝하게 남아있는 것보다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없다. 이쪽에서 해결이 안되었으면 저쪽에서 해결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며칠 후 홍콩으로 돌아가, Y팀장과 술 한잔 하자고 했다. 센트럴의 란콰이펑이라는 번화가의 구석에 있는 한적한 맥주집으로 갔다. 주변에는 둘 뿐이었다. Y팀장은 항상 테이블에 휴대폰을 뒤집어 놓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젠 그것마저도 의심스러웠다. 맥주를 시키고, 안주를 시키고, 정적이 조금 흐르고, 내가 대뜸 물었다. "혹시 지금 녹음하고 계십니까?" Y팀장은 눈에 띄게 당황을 하면서, 자신의 폰 액정을 보여주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그러자 나는, Z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여러 모로 찝찝한 것들이 해결이 되지 않았다, 아마 그만둘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Y팀장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 쉬면서, 제가 정말 죄송하다고, 이건 정말 최 팀장님과 저만의 비밀이라고 하며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사실 Z대표님이... 저의 친형입니다."

순간 어안이 벙 쪘다. 아니, 왜? 아니, 어떻게? 전혀 닮지도 않았고 성도 다른데? 아, 생각해보니 두음법칙을 적용 안했으면 둘이 성이 같구나. (그러면서 가족사를 짤막하게 이야기 해주었는데, 자세히 이야기하지도 않았거니와 프라이버시니 생략하도록 하겠다) 왜 그걸 숨기냐고 하는 내 질문에, 우리가 불편할까봐 말을 안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이 친형이라서 무엇이든 다 이야기했는데 이번에 실수한 것 같고 앞으로는 필터링을 좀 해서 전달해야겠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그런데 최 팀장님 홍콩지사에 꼭 필요하니 있어달라고, 정말 붙잡으려고 이렇게 다 털어놓는다고 이야기를 했다.

집까지 홍콩의 밤거리를 걸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홍콩의 밤은 언제나 묘하면서도 향락적인 정취가 있다.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의혹들이 해소가 되어 시원하기도 했고, Y팀장은 분명히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촉은 결국 맞았는데, 향후에도 두고두고 Y팀장은 나를 여러 모로 도와주고 내 편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어차피 나는 막다른 길목이었다. 보스턴에서도 4개월만에 그만두었는데, 여기서도 몇 달만에 그만두면 커리어의 공백이 너무나도 커진다. 그렇다고 내가 이직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이 바닥에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경영학을 전공한 내가, 이미 급속도로 자동화되고 수학 및 컴퓨터과학 전공자들이 장악해 나가는 트레이딩 업계에서 코딩도 개발자들처럼 못하고 수학 기본도 되어 있지 않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래서 내 원래 계획은 여기에서 그런 것들을 공부해가면서 커리어를 전환해 나가는 것이었다. 돈 몇 푼 더 버는데 눈이 멀어 시카고에서 허송 세월하고 보낸 내겐 그렇게 선택권이 없었다. 실력이 없는 나는 그저 흐름에 나를 맡길 수밖에 없을 뿐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떤 잘못을 한 것일까, 어둠 속에서 계속해서 되뇌였다. 분명히 20세부터 내 삶의 주도권은 온전히 내가 쥐고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을 했다. 힘든 일들은 많았지만 거의 다 내가 스스로 내린 결정들의 후폭풍들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가지 않고 일본과 중국, 홍콩에서 대학 생활을 하겠다는 결정, 미국으로 넘어오겠다는 결정, 심지어 훈련소에 있을 때 KCTC라는 특수부대로 가게된 결정, 레바논 파병을 가게된 결정, 시카고로 가서 트레이더가 되겠다는 결정, 보스턴으로 가 헤지펀드를 시작해보겠다는 결정. 그 모든 결정들이 나의 자의로, 여러 가지 옵션 중에서 내가 고민해서 고른 선택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내겐 내가 걸을 길을 마음대로 결정할 주도권이 없었고, 내 앞에 놓인 선택지도 없었다. 내 욕망이 내 그릇과 분수에 비해 지나치게 앞서 모든 일들을 그르쳤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을 머리로 인지하면서도 아직도 마음 속에서 일렁이고 들끓는 것들을 잠재우지도 못했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해결하지 못한 내 안의 이 패러독스가 나를 그르쳤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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