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2017 – 2021)

[2019.05.19]살아가는 시간

Author
Irealist
Date
2019-05-19 11:36
Views
810

한국에 2주 다녀왔을 때, 와이프와 아기는 처가에서 3주 더 머물다가 오기로 하여서 내게 오랜만의 홀로 있는 시간이 생겼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아무리 가족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거의 지난 1년 반은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여유가 도저히 없었다.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와이프도 나도 너무도 힘들었다. 입덧이 너무도 심해서 168cm인 와이프는 40kg까지 체중이 줄었었고, 거의 위독한 지경까지 갔었다. 출산 이후도 산후조리가 잘 안되 와이프의 건강도 좋지 않았고, 둘이서 아둥바둥 처음해보는 육아를 맞이해서 정신이 없는데 양가 부모님이 한국에 계시니 스트레스도 심했고 서로 싸우기도 많이 했다. 이러한 시기를 겪으면서 정말 느낀 점들이 많았는데, 그 첫번째는 "집에서 애나 보라"는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 말인지 깨닫게 되었다. 두번째는, 이전에는 기러기 아빠들이 불쌍하고 어휴 자식들 위해서 저렇게 희생하는구나 생각했는데, 이제는 동정심은커녕 왜 기러기 아빠들이 기러기 생활을 자처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솔직한 심정으로 와이프와 아기를 처가에 두고 3주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 너무나도 신났다. 그렇게 신났는데 막상 미국에 홀로 와서 며칠 지내니 일주일이 채 되기도 전에 와이프와 아기가 보고 싶고, 외롭고 적적하고 심심하다.

이런 기분이 든 것이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와이프를 만나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이 감정과 비슷한 감정이 든 적이 언제였나 생각을 해 보면 보스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밖에는 함박눈이 쌓이고 있는데 커다란 아파트에 홀로 앉아 있었을 때의 감정.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직감도 있었지만 그것을 떠나 공허한 느낌. 외로운 감정. 보스턴에 있던 군대 동기를 만나 술을 마셔도, 시카고나 뉴욕을 가 친구들을 만나고 와도 채워지지 않던 그 한산함. 무엇인가 짓누르는 듯하면서도 하늘하늘 부대끼는 듯한 감각. 내가 어느 새부터인가 그 시절의 느낌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면 홀로 되고 싶고, 홀로되면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의 한계적 효용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내가 이미 가진 것, 충족되고 있는 것의 가치는 충족될 수록 낮아진다. 불교에서는 고락이 윤회한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고와 락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동전을 열심히 뒤집는 인력은 욕망의 한계 효용 함수의 문제이다.

고락이 윤회한다는 개념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러면 락을 얻었을 때 자중하고 조심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잘 나가고 성공하면 교만하게 되고 마음의 수비가 얕아져 여러 문제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의 일부분밖에 보지 못한 것이었단 사실을 깨닫는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락을 얻으면 고를 향해가는 것은 내정된 수순이지 조심해서 피하고 말고의 개념이 아니다. 교만하지 말고 자중한다는 것은 한시적으로는 맞는 설명이지만 이는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지 못하다. 한마디로 말해 사람은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락을 얻었을 때 해야할 일은 자중하고 조심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detachment, 굳이 번역하자면 관조하는 것이다. 자신과 거리를 두는 것, 그런 채 자신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에게서 멀어져서 나의 상황을 관조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을 통해 현재 내 가까이 있는 것들에 감사할 수 있다.

그렇게 나 자신을 관조하고 내 삶을 관조하다보면 와이프에게 가장 고마운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게 현재를 살아가게 해 주었다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시간대가 조금씩 어긋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를 살아간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집착하고 그 기억에 사로잡혀, 현재도 과거의 파생된 시점으로서 일일이 영향받으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미래를 살아간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바라보고 미리 계획해 보고, 닥치지도 않은 불행을 걱정한다. 오롯이 현재에 충실한 사람은 드문 편이다. 카르페 디엠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사람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와 미래"만"을 오가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과거를 돌이켜보고 곱씹으며 후회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글로 정리하고, 언제나 미래를 계획하고 가능성을 점치고 내가 잘 되는 비전을 꿈꾸고 오지도 않은 불행을 걱정했다. 내게 현재는 없었다. 현재가 없었기에 일상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일상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에 단편적이고 일차원적인 시간을 보냈다. 반면 와이프는 현재를 사는 사람이다. 와이프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가끔씩 과거로 돌아가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언제나 대구외고 시절, 혹은 벳부 시절을 꼽는다. 그러나 와이프는 언제나 진심으로 지금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딱히 후회하는 일도 없다. 또한 미래를 점치지도 않는다. 내가 연말에 회사 스톡옵션이 얼마나 들어온다고 신나서 이야기하면, 와이프도 조금 신나는 반응을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우리 손에 들어올 때까지는 우리 돈이 아니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현재만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는 생각이 없이 살거나 쾌락추구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와이프는 또 그렇지도 않다. 그냥 중심이 잡혀 있는 사람이고, 현재에 단단한 뿌리를 내려놓고 조망하는 사람이다.

그런 와이프를 만나게 되어 나는 일상의 기쁨을 얻었다. 맛있는 음식에 기뻐할 줄 알고, 한가로운 나들이를 즐길 줄 알게 되었다. 음악을 듣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고, 오늘 무엇을 하지 않고 보내도 불안하지 않다. 소소한 행복을 잘 느끼는 와이프에게는 무엇이든 해 주고 싶고 기쁘게 해 주고 싶다. 왜냐하면 그 반응이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보고 있으면 와이프는 나와 달리 참 대접받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다. 무엇을 해 주면 더 해 주고 싶게 느끼게 한다. 나는 그런 인간은 아니다. 아마 해 주면 섭섭할 인간일 확률이 높다. 기쁜 반응이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인데, 그래도 많이 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좋다. 아린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를 살지 않는 아버지는 아마도 좋은 롤모델일지는 몰라도 좋은 아버지는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쓰다보니 너무 와이프 칭찬을 했나 싶다. 애 키우다보면 미워 죽겠을 때도 있는데 이런 날도 있어야지.

Total 0

Total 175
Number Title Author Date Votes Views
Notice
[공지]뉴욕 재학 및 재직 중 블로그 글입니다
Irealist | 2016.09.11 | Votes 0 | Views 7537
Irealist 2016.09.11 0 7537
129
[2019.10.21]아귀지옥 II
Irealist | 2019.10.21 | Votes 0 | Views 741
Irealist 2019.10.21 0 741
128
[2019.10.20]육아
Irealist | 2019.10.20 | Votes 0 | Views 535
Irealist 2019.10.20 0 535
127
[2019.09.06]홍콩에서 있었던 일 - 8: 룸살롱, 유흥
Irealist | 2019.08.29 | Votes 0 | Views 3807
Irealist 2019.08.29 0 3807
126
[2019.08.27]홍콩에서 있었던 일 - 7: 면담
Irealist | 2019.08.27 | Votes 0 | Views 846
Irealist 2019.08.27 0 846
125
[2019.08.06]CFA
Irealist | 2019.08.06 | Votes 0 | Views 1143
Irealist 2019.08.06 0 1143
124
[2019.07.17]일상
Irealist | 2019.07.17 | Votes 0 | Views 683
Irealist 2019.07.17 0 683
123
[2019.06.04]홍콩에서 있었던 일 - 6: 도덕적 해이
Irealist | 2019.06.04 | Votes 0 | Views 558
Irealist 2019.06.04 0 558
122
[2019.05.19]살아가는 시간
Irealist | 2019.05.19 | Votes 0 | Views 810
Irealist 2019.05.19 0 810
121
[2019.05.04]현재 하고 있는 일들
Irealist | 2019.05.04 | Votes 0 | Views 919
Irealist 2019.05.04 0 919
120
[2019.04.27]재편
Irealist | 2019.04.26 | Votes 0 | Views 542
Irealist 2019.04.26 0 542
119
[2019.03.05]해킹
Irealist | 2019.03.05 | Votes 0 | Views 626
Irealist 2019.03.05 0 626
118
[2019.02.17]데이터 사이언스의 미래
Irealist | 2019.02.18 | Votes 0 | Views 860
Irealist 2019.02.18 0 860
117
[2019.02.08]악의
Irealist | 2019.02.09 | Votes 0 | Views 599
Irealist 2019.02.09 0 599
116
[2019.01.21]홍콩에서 있었던 일 - 5: 내부자 거래
Irealist | 2019.01.22 | Votes 0 | Views 725
Irealist 2019.01.22 0 725
115
[2019.01.04]의식과 인식의 지평
Irealist | 2019.01.04 | Votes 0 | Views 529
Irealist 2019.01.04 0 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