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2017 – 2021)

[2019.02.08]악의

Author
Irealist
Date
2019-02-09 13:51
Views
599
한두 달 전쯤 극도로 불쾌한 경험을 하였다. 회사 사무실이 있는 세계무역센터 로비의 복도 코너를 돌다가 어떤 백인과 마주쳤는데, 잠시 멈칫한 그는 얼굴 만면에 적의를 드러내며 나를 벽쪽으로 쾅하고 밀치며 지나갔다. 복도가 좁은 것도 아니었고, 나와 그 외에는 그의 뒤에서 따라오던 백인 여성 뿐이었는데, 대놓고 고의적으로 나를 세게 친 후 지나갔고, 그 강도가 굉장히 세서 뒤에서 걸어오던 백인 여성이 헉하며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나는 처음에는 그런 노골적인 적의에 어안이 벙벙해서 총총걸음으로 빠르게 사라져가는 그를 5초 정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다 떨떠름하게 미팅 시간 때문에 발걸음을 옮겼다. 그 직후에는 그저 재수 옴붙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시간이 지날 수록 어깨뿐만 아니라 목까지 아파와서 병원에 갔더니 전치 6주가 나왔다. (물론 그 주수는 의사가 좀 길게 잡은 것 같았다) 의사 말로는 사람이 보통 어깨를 부딪히는 상황이 오면 상반신이 긴장을 하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 되지는 않는데, 나의 경우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 긴장을 하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세게 맞는 바람에 근육과 인대가 많이 놀란 모양이라고 했다. 일을 하는데 계속 목이 불편해서 5분마다 하늘을 올려다 보아야 했다.

이 사건은 내게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었다.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 미국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매우 심각해졌는데, 그 백인도 내가 아시안이어서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일까라는 의문과, 그런 의문을 떠올리는 내가 피해의식에 젖어있는 건 아닌가라는 자기 검열이 있었고, 처음에는 얼얼하기만 하다 나중에 목과 어깨로 전이된 통증처럼, 나의 마음도 처음에는 얼떨떨하기만하다가 점점 생각하면 할수록,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은 은근한 피해에는 즉각 반응하고 분노하지만, 너무도 직설적인 악의를 직면하면 오히려 반응이 느린 법이어서, 일주일이 지나갈 즈음부터 언제나 출퇴근하는 그 복도를 지날 때마다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그 자리에서 그 놈을 잡지 않았을까? 나도 가서 한 대 칠 걸 그랬나? 하지만 그랬으면 나의 비자도 취소되고 미국에서 추방되었겠지? 지난 달 우리 동네 쇼핑몰에서도 두 명이 총에 맞을 정도로 요새 총기 사건사고도 많은데 그냥 조용히 지나가길 잘한 것이겠지? 그런데 그러면 앞으로 내게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더라도 참아야 하나? 만약 와이프와 아린이가 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꽤 많은 생각을 했다. 나중에는 그저, 왜 자꾸 불쾌한 경험을 되풀이해서 떠올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지 난감했다. 내게 쓰레기를 주고 갔는데 그 쓰레길 버리지 못하고 계속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이 사건이 지극히 불쾌한 사건이긴 하지만, 아니, 지극히 불쾌한 사건이기에 더욱더 내가 이 사건에서 얻어내는 것이 있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저 불쾌한 일을 당한 것으로 결론나면 두고두고 생각날 것만 같았다. 내가 이 사건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번째는 이런 사건이 재발할 경우, 혹은 단순한 타박상이 아닌 더 심한 일을 당할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해야할지 시뮬레이션을 해 보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이 사건을 둘러싼 상황을 토대로 사색을 하여 교훈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첫번째의 일환으로 먼저 월드 트레이드 센터 시큐리티에 연락을 하였고, 시큐리티는 그가 나를 세게 치는 CCTV 장면을 검색하여 확보해 주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의 관련 법을 조사해 보았는데, 이 정도는 assault (폭행) 죄는 성립하지 않지만 경범죄인 battery (타격?)는 성립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난 번엔 거리에서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침을 뱉는 일이 보았었는데, 침을 뱉는 것도 불쾌한 신체접촉에 해당하므로 battery에 속한다는 것도 곁들여 알게 되었다. 내가 만일 이 가해자를 응징하기로 결심할 경우, 뉴욕 경찰에 신고를 하면 경찰이 빌딩 관계자에게 CCTV 카피본을 뜬 후 조치를 취하게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내가 빌딩 관계자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번에는 빌딩 시큐리티가 그 사람이 빌딩의 tenant가 아니라는 이유로 경찰의 CCTV 카피 제출 요구에만 응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다음에 그 일이 일어날 경우 빌딩의 tenant only 구역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인정되므로, 빌딩의 책임 소재를 문제삼으면 되겠다는 교훈도 얻었다. 변호사에게도 연락해서 이럴 경우 어떠한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으며 곁들여 여러 유용한 법적 지식도 습득하게 되었다. 

위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굉장히 유용한 지식을 많이 얻게 되었는데,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두번째였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어떠한 사색을 할 수 있으며, 어떤 교훈을 얻어서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을까. 그 중에서도, 사람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사라지게 할 수 있는가가 내겐 중요한 문제였다.

1. 처음에는 그를 합리화시키려고 했다. 최근에 이혼을 당했던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던가, 그런 상상을 함으로써 그에 대한 동정심을 끌어와 그에 대한 분노의 불길을 소화시키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을 사용할 경우, 상대가 실제로 그런 몰골을 할 경우 도움이 되지만, 그는 지나치게 깔끔하게 잘 차려 입은 중년이었고, 이 방식의 한계는 결국 나의 무의식에서 그게 사실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상상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두 장애물을 넘어서더라도, '그렇더라도 그게 합리화가 되는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남는다. 

2. 그 다음 시도는 그의 불행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그가 쌓은 그러한 업보들 때문에 그는 더 불행해질 것이다. 사고를 당한다던가, 인간 관계가 파탄 난다던가. 그러나 이 또한 그저 내가 원하는 상상일 뿐이다. 인과응보, 권선징악은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의 연장선에 있는 자기최면일 뿐이다. 실제로 자연은 만물을 추구로 여길 뿐이며,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가 업보인 것이지, 사람들이 믿는 그런 응보는 존재하지 않음을 나는 알고 있다.

3. 세번째 시도는 나의 잘못을 통해 사건을 합리화해보는 것이었다. 내가 보지도 않고 코너를 돈 잘못도 있지 않은가 등등. 이는 간단히 실패했다. 코너를 돌다 부딪힌 것도 아니고, 서로 마주보고 잠시 선 뒤 그가 내게 돌진했다. 내가 잘못한 부분은 조금도 없다. 여담으로, 이런 합리화 경향은 안타깝게도 성폭행 피해자들이 많이 빠지는 나락이다. 행여나 내가 잘못한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초래한 부분은 없는가, 라는 자책. 사람들은 왜 성폭행 피해자들이 이 나락으로 빠지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자존감이 낮아져서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러는 이유는 결국 너무나도 괴로운 본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함이다. 차라리 내가 잘못했기에 받은 벌이라고 생각하는게, 난 잘못한게 없는데 피해를 당한 억울함보다는 나으니까.

4. 이 즈음에서 내 맞선임이었던 오 일병이 생각났다. 21살 오 상병에게 따귀를 맞던 28살 오 일병님. 그는 따귀를 맞은 직후 내게 씩 웃어주었고, 어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냐고 묻는 내게, 오 상병을 로봇이라고 상상하면 모든 상황을 희화화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저 그렇게 따귀 때리고 화내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봇. 그렇다, 인간에 대한 환상을 깨는 것은 이런 경우 굉장히 유효한 방법이다. 사람은 사람에게 큰 환상을 갖고 자아를 가진 실체라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사람이 인격적 자아에 의해 내리는 선택들은, 동물적 본능에 의해 내리는 선택들에 비해 많지가 않다. 그런 부분들을 생각해보면 화를 다스리기가 한결 쉬워진다. 새가 내 머리에 똥을 쌌다고 새에게 분노하여 몇날몇일 그 새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기가 내 피를 빨아갔다고 해서 모기에게 분노하여 어떻게 복수할까, 어떻게 모기에게 고통을 줄까 고민하지 않는다. 한 발 더 나아가, 돌부리에 걸렸다고 해서 돌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애초에 분노란 대등한 존재에게 느끼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저 그런 상황이 오면 그런 행동을 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인격을 가졌을 뿐이다. 이 방식은 어느 정도 내게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았다. 이 방식의 모순은 결국 나도 인간이기에 나 자신도 자연화해서 생각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통의 난이도가 아니다.

5. 마지막으로 모든 분노를 눈 녹듯 사라지게 해 준 것은, 결국은 이 일기에 쓰인 내용과 교훈들을 정리하면서였다. 많은 법적 지식을 알게 해 준데다, 이렇게 많은 사색을 하게 해 준 그는 나의 스승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되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 후로 가끔 그가 떠오를 때마다, 아이고 우리 스승님 어디 계실라나, 라고 되뇌였다. 그러한 반복을 통해 나는 이 불쾌한 경험에서 단시간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일기란 환상적인 것이다. 불쾌한 경험들로부터, 숱한 사색과 교훈들을 얻게 해 주어 이를 유쾌한 경험으로 승화시키니 말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나는 성장했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으며,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숱하게 마주할 악의들에 대한 예방 주사를 맞았다. 나를 세게 밀치고 간 그는, 실로 멋진 인연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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