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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4]홍콩에서 있었던 일 - 6: 도덕적 해이

Author
Irealist
Date
2019-06-04 05:19
Views
558
6.

몇몇 이들은 왜 내부자거래가 그렇게 잘못된 거냐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 피해주는 것도 없지 않은가.

피해는 분명히 있다. 다만 가랑비에 옷 젖듯 다수를 적시는 피해이기에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지. 주식은 분명히 선물옵션처럼 완전한 제로섬 게임은 아니며,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파이가 증가하는 게임이다. 그러나 제로섬은 아니더라도 한정된 파이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동일하다. 남이 가진 파이를 내가 가져가기도 하고, 증가하는 파이를 소수가 독차지하기도 한다. 그러한 게임에서는 규칙이 공정하게 지켜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내부자거래는 그러한 주식시장에서 반칙을 하는 것이다. 내부자 거래가 죄가 아닌 세상을 상상해보면 왜 그것이 문제인지 알기 쉽다. 내부자 거래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상장된 기업들의 임원들은 전부 떼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기업의 분기 실적이 좋으면 주식을 산 후 실적 발표를 하면 되고, 안 좋으면 미리 팔면 되니까. 그들의 주식 시장에서의 불균등한 지위, 즉 정보를 미리 얻을 수 있는 위치를 가지고 부당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공공 사업의 입찰에 비유한다면, 공무원과 친분이 있다는 불균등한 지위를 이용해서 불공정하게 딜을 따내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사기이다.


누구에게 피해주는 것도 없잖아? 라고 되물을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행위는 누군가에게 100의 피해를 입히기보다는 사회 전체 구성원들에게 0.001씩 피해를 입히는 행위이기 때문에 살인이나 강도만큼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다뿐이지 이런 행위들이 야기하는 직간접적 피해의 총합은 살인보다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질나쁜 일부 공무원들이 뇌물을 받는 행위도 이와 비슷하다. 누구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없지만, 전 국민의 혈세를 인당 0.00001씩 훔쳐간다. 이러한 행위로 인한 결과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되는 부분은 사회 전반에서 파괴되는 '신뢰 자본'이다. 신뢰 자본이란 쉽게 말해서 사회가 얼마나 공정한가에 대한 믿음인데, 이것이 튼튼하게 구축된 사회에서는 모두가 사회의 공정함을 믿고 룰에 따라 페어플레이를 하는 반면, 그 자본이 파괴된 사회에서는 '규칙을 따르면 손해'라는 태도가 만연한다. 우리 나라는 현재 신뢰 자본이 많이 파괴되어 있는 상황이다. 너도나도 좋은 학교 배정되려고 불법 전입하는데, 안하면 바보 아닌가? 너도나도 레포트 검색해서 베껴서 내고 A학점 받는데, 나만 직접 레포트 쓰느라 시간 쏟아서 B받으면 바보되는 것 아닌가? 신뢰 자본의 파괴에 기여하는 행위는, 그 행위의 직접적인 피해를 떠나 2차, 3차의 가해와 그에 따른 피해를 불러온다.


이러한 신뢰 자본이 파괴된 사회에서, 기업 고위 임원들을 룸살롱에 데려가 접대하고, 떡값을 좀 줘서 정보를 얻어 주식 거래를 하면 한 달에 30%가 우스운데, 세상 어느 바보가 억대 연봉을 주며 통계, 금융공학 박사들을 데려다가 열심히 퀀트 트레이딩 리서치를 해서 "겨우" 연 20%를 낼까? 이런 세태에서는 퀀트 트레이딩 같은 산업이 발전할 토양 자체가 사라진다. 이미 미국에서는 10년 전 쓰다 버려진 전략이, 한국에서는 4차 산업 혁명 인공 지능 전략으로 둔갑한다. 그러다 최신 기법으로 무장한 미국, 영국의 헤지펀드들이 한국 주식 시장에 들어와 고수익을 올리면, 그에 대항해서 기법 연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미디어를 통해 "악덕 해외 자본이 음성적인 수법을 통해 한국의 순진한 개미들에게서 수백억원을 털어먹었다"라는 뉘앙스의 여론을 조장하는 한편, 끊임없이 정부에 로비하고 부채질해 그런 기법 자체를 규제해 버린다. 이런 토양에서 어떻게 실력 있는 트레이더가 나올 수 있을까. 누가 제대로 퀀트 펀드를 운용하려고 할까. 심지어는 한국 거래소 직원조차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얼마 전, 본인의 책에 내 실명을 허락없이 사용하고 본인의 경력을 위조하던 사람에게 언짢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의 됨됨이를 살펴보면 굉장히 선한 인상에, 좋은 대학을 나왔으며, 언변도 수려하다. 곰곰히 그가 과연 악인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망설여진다. 본인의 경력을 조금 속였다고, 그를 악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상에 얼마나 더 더러운 사람들이 많은데. 그리고 사람이란 그렇게 일차원적인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어떤 부분에선 지극히 선한 자가 어떤 부분의 도덕 기준은 낮은 경우도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지극히 악한 자도 다른 전반적인 부분에서는 선한 경우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그는 정말 살인자같은 악인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도덕 기준이 조금 낮을 뿐이다. 그런데 도덕 기준이란게 도대체 무엇인가?


지난 여름, 미국 서부에서 박사하고 있는 누나가 우리 집에 놀러왔다가 갔다. 그런데 있는 내내, 내가 설거지를 할 때 너무 물을 아껴쓰지 않고 분리수거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성화였다. 나는 누나가 되게 유별나고 피곤하게 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에피소드가 요즘 갑자기 굉장히 큰 생각거리를 제공해 준다. 설거지를 할 때 물을 아껴쓰는 것,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는 것, 전부 당연히 반론의 여지가 없는 도덕적인 일이다. 누나는 그런 도덕적인 일을 주장한 것이고, 나는 그게 귀찮고 내 편의에 위배되므로 무시했다. 분명 이 에피소드로 미루어본 나의 도덕 기준은 누나보다는 낮다. 그러면 나는 악인인가? 만약 내가 그 사람이나 Z대표를 악인이라고 한다면 나도 누나의 입장에서는 악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내가 과연 내가 물을 아껴쓰지 않았기에 악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가? 용납하지 못하겠다면 그 저자나 Z대표도 스스로 그렇게 평가되는 것을 납득할 이유가 있는가? 이러한 도덕적 상대주의의 딜레마에 관련한 해답을 몇 달간 찾을 수가 없었다. 누구나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라는 명제 하에서 출발을 해 보아도, 물을 아껴 쓰지 않는 것은 분명히 타인에게 미미하게나마 피해를 주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물을 아껴 쓰지 않는 것이 전체 인류에게 제각각 0.00000000001씩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0.001씩 피해를 주는 내부자거래를 하는 것과 오십보 백보가 아닌가? 결국 1차원의 직선의 양 극단에 선과 악의 스펙트럼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각자의 편의와 가치관대로 그 어느 점에 기준을 두고 타인의 선악을 재단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 몇 달 전쯤 일기에도 기록했듯 월드 트레이드 센터 로비의 복도 코너를 돌다가 백인 남성이 고의로 온 힘으로 나를 밀쳐 전치 6주가 나온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것 중 하나가 사람을 전혀 색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결국 자연의 일부다. 새가 내 차에 새똥을 쌌다고 분노하지 않고, 모기가 나를 물었다고 분노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와 모기의 자연스러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문명화되면서부터 언젠가부터 인간에 대한 환상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결국 인간도 동물적인 본능 위에 조금더 고등한 본능인 이성이 덧칠된 존재이며 뭐니뭐니해도 본인의 쾌락을 극대화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이다. 이타심, 부성애, 소속 욕구 등도 모두 유전자의 관점에서 유리한 특성이기 때문에 발달된 것일 뿐이지 특별히 다른 차원에서 온 고결한 덕성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는 성악설과는 다르다. 성수설, 태어나길 금수로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타인이 도덕적이다 아니다라고 재단하려고 드는 것은 그 저변에 사람은 동물과 달라야한다는 환상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환상을 한꺼풀 벗기고 바라보면 그런 사기꾼들은 그저 부도덕한 악한 존재라기보다는 조금 더 동물적인 존재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물의 시체를 먹는 까마귀처럼, 그들도 본성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양한 행동 패턴을 가진 다양한 종이 있듯이, 인간들 중에서도 다양한 본성을 가진 개체들이 태어나기 마련이다.


이런 논리가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어찌되었든 어떠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더라도 인간은 이성이라는 혜택을 누리는 만큼 부단히 수양할 의무를 가진다. 즉, 스스로를 "디버깅"해야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디버깅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명상이 아닐까 싶다. 불교에서의 명상도 그러하지만 기독교에서의 기도도 사실 타 존재를 빌린 명상이다. 그들의 죄는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행동한 것에 있다기보다는, 동물적인 수준에서 벗어나려는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자각 후의 노력을 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적고보면 묘하게 기독교의 "원죄"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예전에는 이 땅에 태어난 우리에게 원죄가 있다고 하면 내가 무슨 죄가 있냐고 반감만 가졌는데, 어찌보면 동물적인 본능 자체가 원죄이고, 그러한 본능을 떨쳐 해탈하도록 해 주는 명상의 방법론이 "믿음"으로 표현되는 기도이며, 동물적 상태에서 벗어나 해탈하고 깨달은 상태를 구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 싶다.


내부자 거래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맥락에서 글을 시작했는데 지난 편의 떡밥조차 회수하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구원까지 왔다. 이 글을 어떻게 구원해야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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