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2017 – 2021)

[2017.11.21]분홍이의 별세

Author
Irealist
Date
2017-11-22 06:26
Views
476

어제 새벽에 가족단톡방에 엄마가 우리집 분홍이가 저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을 알렸다. 

아직도 개가 아니라 '우리집 강아지'가 입에 더 붙을 만큼 재롱 많은 아이였다. 그저께도 부모님과 같이 산책했는데 오늘 아침에 의식이 없어서, 병원에 데리고 가 호흡 편하게 해주는 주사 맞추니 천천히 숨을 거뒀다고 한다.


분홍이와는 내가 고2, 그러니 지금부터 14년 전에 만났다. 막내 할아버지 집에서 분양받아온 강아지였는데, 분홍이가 오고 난 후에 흰 순종 진돗개를 준다는 사람과, 달마시안을 준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이미 개가 있다고 거절하셔서, 우린 내심 똥강아지 때문에 좋은 강아지 못받았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 갓난 아기였는데, 밤이 되면 찡찡대서 내가 새벽에 일층으로 내려가 쓰담쓰담해 주고는 했다. 


분홍이가 아직 어릴 적, 파보바이러스인가하는 장염이 걸렸는데 치료해도 치사율이 70%인데다 치료하는데 비용이 수백만원이라고, 수의사가 '그렇게 비싼 개도 아닌데 포기하시죠'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그래도 우리 집에 온 생명인데 그럴 수는 없다고 수백만원을 들이고 입원까지 시켜서 정성스럽게 치료했고, 결국 건강을 회복했다. 당시 아버지가 신경 쓸 일이 많아 위경련으로 입원을 했었는데, 아버지 입원 병실 비용보다 분홍이 입원 비용이 정확히 두배라고 우스개소리를 한 것이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분홍이는 건강하고 활기차게 지냈다. 너무 까불이라서 밉상인 적도 있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고 온 숲을 돌아다니는 사고뭉치였다. 한 번은 살쾡이한테 얼굴을 긁혀 오는 바람에 한달 넘게 꼬깔콘 같은 것을 머리에 달고 지낸 적도 있다. 


내가 시카고 - 보스턴을 거쳐 패잔병처럼 4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분홍이는 날 알아보고 반갑게 반겨주었다. 그런데 2015년 초 당시에 이미 분홍이는 많이 늙은 느낌이었다. 눈도 잘 안보이는 것 같았고 냄새도 잘 못 맡는 것 같았는데, 내가 집에 돌아올 때면 한참 짖다가 몇 미터로 가까워지면 급반기며 꼬리를 흔들기 일수였다. 거동도 불편해서 날씨가 좋은 날도 마당 볕드는 곳에 매일 누워있기만 했다. 나는 그때 분홍이의 남은 날이 몇 달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일년이 지난 2016년에는 분홍이가 흡사 회춘한 것 같았다. 어두침침해 보이는 눈곱낀 눈도, 말똥말똥히 총기가 가득찬 건강한 눈으로 바뀌었고, 힘차게 온 마당을 다시 뛰어다녔다. 정말로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일이었다. 외견 상으로는 한창 시절이었던 5, 6세 때와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그 이후로 뉴욕에 온 후 내 삶이 바빠 한창 분홍이를 잊고 살았다. 그런데 어제 밤에 소식을 듣고는 먹먹히 있었다. 잠이 오질 않는데, 자다가 깨서 그런 건지 그 소식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사람식으로 말하면 '호상'이라고 했다. 아프거나 고통스럽거나 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건강하게 산책도 다니고 그러다 오늘 조용히 의식이 없어졌다고 했다. 만 14년을 살았는데 개의 1년은 사람의 8년이라니 무려 112살을 살았다. 누나는 엄청 울었다하고 엄마도 목소리가 떨렸었는데, 나는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마음 깊이 무언가 미동하는 느낌은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느낌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카페인에 매우 민감하여 에스프레소같은 걸 마시면 한참 동안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식은땀이 흐른다. 그보다 더 미묘한 버전의 기분이었다. 저녁에 와이프가 녹차를 주었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겉으로 터져나오는 슬픔이라던가 눈물 같은 것은 없었다. 정말로 별 생각이 들지 않고 담담했다. 데몰리션이란 영화가 생각이 났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지나서 이렇게 글을 쓰는 와중에도 큰 슬픔은 없다. 모르겠다. 난 정이 없는 인간인 걸까? 

고교 시절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그 자체만으로 내게 복받치는 슬픔은 없었다. 다만 병원에 가서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갑자기 슬픔이 복받쳐서 눈물이 막 났었다. 


어찌되었든 어제 밤 조용히 기도를 했다. 성불했기를 바라고, 그러지 않고 다음 생이 있다면 좋은 곳에 태어나 행복하고 사랑받으며 살다 성불하길 바란다고 기도를 했다. 개들은 정말 선업을 많이 쌓다 세상과 이별하는 종인 것 같다. 그렇게 사람에게 무차별적인 애정을 표현하며 한평생을 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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