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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2]지금 알고 있는 것을 안다면

Author
Irealist
Date
2018-05-07 12:37
Views
571

읽을만한 책을 찾을 때였나, 어디선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안다면"이라는 구절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안 채로 과거로 간다면 바꾸고 싶은 것들이 있는지 생각했다. 


유년기 시절부터 시간순으로 생각하면 가장 먼저, 고교 선택에 있어서 아마 과학고를 가지 않았을까 싶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물리, 화학 공부를 하다가 켄자스 다녀와서 외고를 선택했었다. 과고도 입학허가를 받았었는데 외고를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우선 과고는 밤꽃 냄새나는 남자들 밖에 없었는데 외고는 70%가 여학생이었다(!) 그리고 내가 미국에서 여름방학 때 돌아왔기 때문에 2학기부터 고등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과고는 보통 2년 조기졸업을 하므로 한 학기를 놓친 것을 따라잡기 힘들다고 아버지가 극구 반대하셨다.


요즘 이공계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이 부분이 가끔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외고를 가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미국에 올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도 확실치 않다. 또한 경영학과를 가지 않았더라면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있기 이전에 데이터 사이언스 석사 지원을 하는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 현재의 나, 나의 관점에 국한되서 생각을 하다보니 내게 현재 필요한 이공계 공부가 절실해 보일 뿐이다. 이공계를 진학한 나를 상정하고 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오히려 경영학적인 센스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공계 백그라운드가 없어서 허우적대는 경영학도들도 많지만, 마찬가지로 서른 넘어까지 이공계 공부만 하다가 편협하고 고집스러운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혹은 서른 중반이 넘어 취업도 제대로 못하는 박사 수료자 및 졸업자들도 많이 보았다. 


그러니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안다면" 과거로 돌아가 "어떻게 하겠다"라는 것은 사실은 과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현재의 나에 대한 소망을 투영하는 가정이다. 현재의 내가 만족스러운 사람은 저 질문을 해도 과거에 바꿀 것이 없고, 현재의 나에 대해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는 사람은 과거에서 현재를 바꿀 수 있는 그 부분을 바꾸고 싶을 뿐이다.


2016년 초, 홍콩에서의 헤지펀드도 실패를 하고 오도가도 못할 때 쓴 일기가 있다.

http://www.irealism.org/xe/index.php?mid=hongkong&page=1&document_srl=196

"현재 상황을 생각하면 지난 5년이 후회되고, 앞으로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난 12년이 후회된다." 라고 적을 정도로 비참한 심경이었고, 모든 것이 후회뿐이었다. 불과 2년이 지난 지금은 저 시기를 포함해서 그 이전 5년이든, 12년이든 후회 한 점이 없다. 내가 고교 시절부터 2016년까지 이르는 15년 남짓한 시간들의 가치가, 불과 2년만에 그렇게 급격하게 변했을까? 애초에 그게 변화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2016년 초의 내가 그 시간들을 비하하고 후회하는 반면 현재의 나는 그 시간들을 가치있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2016년 초의 내가 2016년 초의 나에 대해 불만스러웠기 때문이고, 현재의 나는 현재의 나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은 간사하고 결과에 지배당하는 동물이다. 지나간 시간은 오롯이 거기 변화하지 않고 있을 뿐이고, 현재와 미래의 내가 당시의 내 상황을 그에 투영해서 이렇게 인식했다가 저렇게 인식했다가 할 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사람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과거에 일어난 팩트는 변화시킬 수 없지만, 과거가 후회스러운 과거였는지 가치있는 과거였는지는 나의 인식에 달린 것이므로, 현재를 변화시킴으로써 이를 변화시킬 수 있다. 과거의 시간이 갖는 가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내가 걷는 길에 따라 변화하는 가변적인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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