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2017 – 2021)

[2018.11.09]홍콩에서 있었던 일 - 4: 홍콩행

Author
Irealist
Date
2018-11-25 00:08
Views
602

4.


2015년 5월경, 부산행 기차를 탔다. A사의 부산지사 설립식에 참여하고, 그곳에서 우리의 고용 계약도 체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부산을 마지막으로 가 보았던 것이 2004년 가을 정도, APU면접을 보러 갔었을 때 였는데 몰라보게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이야 굉장히 많이 변화했지만 대구는 10년 전이나 예나 크게 다를 바 없이 정체된 도시인 느낌인데 부산은 활기차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이 들었다.


저녁에 상당히 고급스러운 호텔의 꼭대기층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Z대표, B이사, 나, J씨, Y팀장, 그리고 사원으로 뽑힌 S씨가 있었고, 부산지부쪽 담당이라는 권상우 닮은 X씨, 그리고 떡대가 어마무지하고 우락부락한 조폭 인상의 T씨가 있었다. 편하지 않은 식사를 하고 호텔의 미팅룸으로 들어갔고, 나는 홍콩팀에서 할 알고리즘 트레이딩 전략들 열 가지 정도를 프레젠했으며, 세 페이지 짜리 고용계약서를 받았다. 연봉은 한국 대기업 초봉의 두배는 되었지만 홍콩의 헤지펀드 업계 기준으로는 턱없이 낮은 액수였는데, 시작부터 지나치게 높은 액수로 시작하면 본인이 배임이 될 수 있으니 성과내기 시작하면 홍콩 업계 기준보다 높게 올려주겠다고 하였다. 고용 계약서의 마지막에는 본 고용 계약서의 내용에 이견이 있거나 차후 법적인 검토가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홍콩의 김앤장 급의 굉장히 유명한 모 법률자문에서 중재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우습게도 계약서 중에 오탈자가 있었다. 즉, 분명히 그 법률자문에서 작성한 계약서는 아닌데 괜히 마지막에 그 법률자문의 이름을 집어 넣어서 뭔가 있어보이게 하려면서도 교묘하게 거짓말은 아닌 문구를 넣어놓았던 것이다. 문제가 있으면 모 법률자문에서 해결한다, 라는 건 지금 그 법률자문과 아무 관계가 없더라도 문제 발생시 그곳에 의뢰하면 되니까.


돌이켜보면 고용 계약서의 오탈자와 같은 미묘한 시그널들이 계속 있었는데 이번에도 어물쩡 무시를 했다. 고용 계약서를 싸인하고 장소를 이동하려 하는데 Z대표가 고급 외제 스포츠카를 몰고 나타났다. 그 차에 나와 J씨, S씨, Y팀장이 탔었던 기억인데, 난 평생에 그렇게 빠르게 모는 차를 타 본 적이 없었다. 분명히 Z대표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술도 한잔 했던 것 같은데, 정말 미친듯한 속도로 차를 몰아서 우리 네 명 전부 엄청나게 긴장을 해 있었다. 이 사람은 장수하진 못하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인생에서 리스크 테이킹을 많이 하는 편이다. APU로 간 선택이라던가, 파병이라던가, 인턴하지 않고 회사를 만든 것, 그리고 트레이더라는 직업 자체가 매일 리스크를 지고 사는 일이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물리적으로 리스크를 지는 것은 극도로 꺼린다. 내 기준에서 그것은 단지 리턴이 극히 미미하거나 없는데 리스크만 엄청나게 큰, 멍청한 트레이드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그런 멍청한 트레이드를 하는 사람이 헤지 펀드를 잘 운용할 리가 없다. 그런 시그널도 무시해버린 그 때의 나 또한 멍청했다. 그날 밤은 일반적인 한국 회사 회식처럼 2차, 3차 혀 꼬부라지도록 마셨던 것 같다. 기억나는 것은 내가 그 당시 여친이었던 와이프와 약혼하고 결혼할 거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B이사가 왜 벌써 결혼하느냐면서 자기는 내 나이 때 유명한 여성 연예인 모 씨 스폰 제의도 들어왔다면서 나를 엄청 순진무구하고 어린 취급을 했던 기억이 나고, 또 순간적으로 그 떡대가 좋고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조폭같은 인상의 T씨가 Z대표가 없는 자리에서 그를 지칭하면서 "형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물쩡 넘어갔던 기억도 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그 때부터는 약 한 달간 부산지부에서 근무를 했다. 듣기로는 서울본사에서는 IPO관련 투자를 하고, 부산지사에서는 벤처 캐피탈 업무를 하고, 홍콩에서는 트레이딩 업무를 하는 식으로 간다고 하였다. 부산지사의 헤드는 I전무라는 분이었고, 그 외에 네댓분들이 계셨는데 전부 중장년층이셨고, 굉장히 좋은 인상들이었다. 홍콩팀은 나, J씨, Y팀장, S사원 네 명으로 확정이 되었다. 한번은 부산지사분들이 우리를 횟집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고, 그곳에서 내 기억으로는 가자미 회를 먹었는데, 내가 태어나서 최고로 맛있는 회였다. 그곳에서 부산지사분들이 Z대표가 없는 자리에서 Z대표가 본인들에게는 은인이라며, 굉장히 좋은 분이라고 극찬을 했었다. I전무님을 비롯해서 그 분들이 인품이 상당히 훌륭해 보이는 분들이라서, 그런 이야기들도 나의 잔류 결정에 기여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한 달을 보내면서 홍콩 팀원 네 명과 가끔 술도 마시고 하면서 친해졌는데, 팀원들은 전부 마음에 들었다. J씨는 미국에서 박사하다가 온, 귀여운 아재같은 느낌의 공대남이었고, Y팀장은 Z대표와 구면같았는데 선하고 정많은 인상의 키크고 호리호리한 타입의 호감형 인물이었다. 월리를 찾아라의 월리같은 느낌도 들었다. S사원은 홍콩에서 대학을 갓 졸업하였는데, 굉장히 똘똘하고 일을 야무지게 잘 했다. 우리는 주말은 각자 집으로 갔다가 평일에는 부산에서 근무하는 식으로 한 달을 보내며, 트레이딩 전략에 대해 토의하고, 업무 지침이라던가 직원 메뉴얼 등을 짰다.


그러다 6월이 되었고, Z대표는 무언가 계속 부산에서 더 기다리길 원했던 것 같은데 우리 팀원들이 부산에서 이렇게 붕 뜬 채로 보내기보다는 얼른 홍콩으로 가고 싶어하는 바람에 홍콩행이 확정되었다. 내가 가장 먼저 가서 세팅을 하고, Y팀장이 따라오고, 그 다음 J씨, S씨가 차례로 홍콩으로 오기로 하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홍콩을 방문했던 것이 2006년 홍콩중문대에서 교환학생을 했었던 때였다. 그 때 그곳에서 교환교수를 하던 V교수를 만나 인연을 맺었었는데, 그것이 8년 후에 보스턴에서의 악연이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싶다. 어찌되었든 9년 만의 홍콩행이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그렇게 도착한 홍콩에서 2015년 여름의 대부분을 나는 땀에 젖어 보냈다. 홍콩의 여름은 찌는 듯이 무더우면서도 더없이 습했고, 꼬불꼬불 이어진 센트럴 골목과 언덕들을 풀 정장을 갖춘 채 미련스레 오르내렸다. 6월 초 홍콩에 도착한 나는 센트럴 중심가에 있는 미니호텔에 한 달을 계약했는데, 정말 왜 이름에 미니라는 이름을 넣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두세평 남짓한 공간에 침대와 샤워시설이 있었다. 첫날 밤 에어컨이 12도로 너무 춥게 맞춰져 있어 온도를 25도로 높였는데, 다음날 아침 방 전체가 흥건히 젖은 채로 일어났다. 벽에도 물기가 흥건하여 정장이고 뭐고 모두 젖어 있었다. 호텔에 항의하였더니 왜 에어컨을 15도 이상으로 했냐며 항상 그 이하로 해 두어야 제습이 된다는 것이었다. 두 평 남짓한 곳에서 머리에 12도짜리 에어콘 바람을 쬐고 있으려니 두통이 생길 노릇이라 또다시 항의를 했더니 히터를 갖다줘서, 히터와 에어컨을 함께 쬐고 있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결국 실랑이 끝에 남은 기간을 환불받고 다른 호텔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약 두 달동안 여러 호텔을 전전하다 센트럴에서 네 정거장 정도 거리의 Tin Hau라는 곳에서 에어비엔비를 통해 두 달짜리 숙박을 하게 되었다. 고층 아파트의 25층 꼭대기에 있는 투베드룸이었는데, 줄리앙이라는 프랑스 교사가 여름 두 달간 본국으로 돌아가는 사이에 내게 렌트를 하는 것이어서 월 140만원 정도의 굉장히 저렴한 가격에 빌릴 수 있었다. 입주하기로 한 날 아침에 잠시 키를 받으러 들렸는데,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나오지 않다가 한참 후에야 팬티만 입은 나체로 나온 줄리앙은, 당황한 얼굴로 집의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세탁기는 어떻게 돌리는지, 오븐은 어떻게 쓰는지 등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내가 알았다며 출근했다가 오후부터 그곳에 들어가겠다고 하며 문을 나오자마자, 문 안쪽에서 어떤 여자가 푸하하하며 웃음을 참고 있다 터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민망해서 숨어 있었던 것 같은데, 줄리앙이 집 구석구석을 보여주는 동안 도대체 어디 숨어 있었을까, 우습기도 하면서 그날 밤은 침대가 괜히 눅진눅진하니 찝찝하기도 했다.

홍콩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무실 답사였다. Z대표는 굉장히 멋들어진 사무실을 원했다. 우리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 정도까지 좋을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홍콩의 센트럴에서도 가장 노른자위 빌딩에 있는 사무실을 렌트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내 첫 임무 중 하나는 그 렌트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홍콩의 IFC보다도 비싼 건물의 전망 좋은 사무실을 렌트하려니 돈이 여간 드는 것이 아니었는데, 결국 월 2000만원이 넘는 가격에 체결을 했다. 우리의 계약당사자였던 N씨는 상하이에서 온 여성이었는데, 기분이 여간 좋은게 아니었는지 우리에게 고급 일식집 대접을 하였다. 뭐 나는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렌트 계약을 체결할 당시에는 수석이라는 직함을 갖게 된 J씨와 Y팀장이 이미 홍콩에 차례차례 와 있는 상태였는데, 팀원들도 사무실을 마음에 들어하고 해서 그곳에서 일하기로 했다.

홍콩의 여름 날씨는 그저 습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분무기를 뿌린 수준이었다. 미니 호텔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에어컨을 24시간 돌리지 않으려면 적어도 제습기라도 있어야하는데, 제습기를 사다 놨더니 몇 시간마다 흥건한 물을 버려줘야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후 때문에 벌레들도 엄청나게 컸다. 미국의 바퀴도 한국보다는 큰 편인데, 홍콩의 바퀴는 한국의 생쥐만 했다. 게다가 날개가 달려 날아다니기까지 했으니 공포가 따로 없었다. 밤길을 걸으면 몇 걸음 걸을 때마다 사라락하며 숨는 바퀴들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도마뱀도 굉장히 많았는데, 25층 꼭대기였던 줄리앙의 집에서도 도마뱀이 심심찮게 보였다. 옷장으로 들어가서 기겁했는데 찾을 수가 없던 걸 보면 어느 벽 틈으로 다니나보다 싶었다.

그래도 홍콩의 밤은 나름의 정취가 있었다. 란콰이펑을 주변을 지날 때면 말 그대로 말초신경을 곤두세운 환락에 젖은 거리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영어, 광둥어, 보통화, 프랑스어, 한국어까지, 거리는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어느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묘한 느낌이었다. 밤에도 쌀쌀하지 않은 기온과 후덥지근한 습기는 감성에 젖게 만들면서도 뉴욕이나 시카고에서 밤이면 느끼게 되는 종류의 씁쓸함은 느끼게 하지 않을 정도로 푸근했다. Tin Hau 근처에 살 때는 주변의 일식 라멘집을 혼자 찾아가 사케 한잔을 하기도 했고, North Point 근처의 호텔에 머물 때는 괜히 술과 안주거리를 사서 해변가의 바위에 앉아 궁상을 떨기도 했다. 이렇게 더럽기 짝이 없는 바다에서도 밤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어 힐끗거리다, 어느새 뉴욕-시카고-보스턴을 거쳐 오며 겪은 일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내 머릿 속은 항상 복잡했다. 그 즈음 약혼을 하기도 했고, 그 즈음 점점 무언가 잘못되어가는 것을 느끼기도 했으며, 아직 보스턴에서 겪은 일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Z대표와 내가 처음으로 크게 부딪혔던 것도 이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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