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2017 – 2021)

[2018.09.30]제대혈 보관

Author
Irealist
Date
2018-10-01 02:21
Views
313

아린이를 낳으면서 한 가지 했던 고민은 제대혈(Cord Blood)을 보관할 것인가 말 것인가였다. 부모 마음이 다 똑같은 건지 주위에서도 제대혈로 고민이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조사한 결과, 우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제대혈을 보관하더라도 그것이 사용되는 80가지 희귀병에 평생 한 가지라도 걸릴 확률이 5000분의 1이다. 한국인이 평생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이 35.2%이고,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1.02%다. 암에 걸릴 확률은 34.4%다. 그에 비하면 0.02%는 실로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미미하다고 해서 그 결과도 미미하단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제대혈 보관은 일종의 보험이다. 보험이란 결국 미래에 낮을 확률로 올 수 있는 큰 피해를, 높은 확률을 가진 작은 피해로 분산하는 도구이다. 이자율, 수수료 등 모든 것을 제하고 단순하게 생각해 볼 때, 큰 교통사고를 당해 1억원의 손실을 입을 확률이 1%라면, 이 위험을 피하고 싶은 100명의 사람이 100만원씩 지출한 후, 사고를 당하는 1명이 1억원을 가져가는 것이 보험의 본질이다. 그 100명의 사람 중에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1%의 확률의 1억원의 손실을 100%의 확률의 100만원의 손실로 바꾼 것이다. 


그런 면에서 0.02%의 확률을 가진 희귀병을 대비하기 위해 지출해야할 금액은 초기 지출 2000달러 + 연 보관비 150달러 등 거의 1만달러 가까이다. 평생 보관비를 일시불로 할 경우 주는 할인 혜택까지 해서 5천 달러라고 보수적으로 가정해도, 0.02%의 확률의 피해에 대비하기 위해 5천 달러의 지출을 한다면, 그 0.02% 확률의 피해의 피해액수는 무려 2,500만 달러, 즉 270억에 달해야 대략적인 금액이 정당화가 된다. 다르게 말하면, 희귀병이 걸릴 경우 치료비를 지급해주는 보험 상품이 있다고 치자. 이 보험 상품의 가격이 500만원이라면, 희귀병 발병 시 지급해주는 치료비 및 위로비가 270억에 달해야 어느 정도 상식적인 상품이란 것이다. 그에 비해 제대혈 보관은, 500만원을 지출해서 270억을 보장해주기는 커녕 실제로는 제대혈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밖에 보장해준지 않는 사기다. (물론 보험 계산이 이 정도 단순하지는 않다. 이자율에, 복리에, 수수료에, 보험사도 먹고 살아야 하고, 다양한 많은 것들이 들어가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선이란 게 있다)


'그래도 자식 위한 건데' 혹은 '그래도 혹시 걸린다면'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의 상술과 부모 마음을 이용한 심리전에 이미 말려들어 있는 것이다. 그 말도 안되는 비율의 금액은 어떻게든 정당화한다고 치자. 더 코메디인 것은 적정 가격의 수백배에 이르는 비싼 보험임에도 피해 이벤트가 발생할 경우에도 '보장이 확실하지 않은 보험'이라는 것이다. 이 많은 금액을 들여서 보관하고, 막상 희귀병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해당 보관이 보증해주는 건 '치료가능성이 있는 제대혈이 보관되어 있다'라는 사실 뿐이다. 아직 줄기세포 관련 치료 연구는 수십 년이 걸려 진척이 있을지 불확실한 분야이므로 치료 자체가 보증되지도 않고, 완치 방법이 개발되었다 하더라도 필시 어마어마할 치료 금액을 커버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냥 제대혈만 거기 오롯이 있다. 더군다나 백혈병으로 인한 골수 이식과 같은 경우에는 결국 본인 제대혈에 백혈병 인자도 있기 때문에 기껏 보관한 제대혈을 희귀병 발병 시 사용하지도 못하는 코메디가 벌어진다. 


그러나 '그래도', '정말 그래도' 1) 나의 아기가 5000분의 1 확률로 희귀병이 발병하고, 2) 해당 희귀병의 제대혈을 이용한 치료 연구가 완료된 상태이며, 3) 그 관련 치료비도 부담할 수 있는 경제 수준이 되는데, 제대혈을 보관해 두지 않아 하늘을 우러러 땅을 치며 후회할 일이 생기진 않겠는가? 그렇지도 않다. 퍼블릭 제대혈 은행들이 있어서 그런 곳에서 제대혈을 구하면 된다. 문제는 돈일 뿐이다. 저 1, 2, 3 조건이 모두 어떻게 맞아떨어져 제대혈 보관을 하지 않은게 후회할 것 같다면, 차라리 합리적인 가격으로 책정된 희귀병 커버되는 건강보험을 아기에게 들어주면 된다. 희귀병이 괜히 희귀병이기 아니기 때문에, 한달에 몇 천원 정도만 내도 희귀병 발병시 억 단위로 받을 수 있다. 그러면 희귀병 발병 시 받는 억대 보험금으로 제대혈을 사서 치료하면 그만이다. 한달에 몇 천원이면 일년에 수 만원, 평생 몇 백만원되지 않느냐 하면 그렇다. 하지만 동일 비용으로 제대혈 보관은 '보관' 자체만 보증되지 그에 따른 치료비는 일체 커버가 안되는 것이고 후자는 일체 커버가 되니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애초에 이 모든 논의가 5000분의 1 확률의 이벤트에 대한 것이란 걸 감안하면, 0.02% 확률의 제대혈 희귀병에 걱정하고 비용 지출할 시간에 34.4%의 암이나 35.2%의 교통 사고에 대해 걱정하고 그에 대한 보험 지출을 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Total 0

Total 175
Number Title Author Date Votes Views
Notice
[공지]뉴욕 재학 및 재직 중 블로그 글입니다
Irealist | 2016.09.11 | Votes 0 | Views 7540
Irealist 2016.09.11 0 7540
114
[2018.12.29]일기와 부정적 감정
Irealist | 2018.12.29 | Votes 0 | Views 628
Irealist 2018.12.29 0 628
113
[2018.12.26]한 해 결산 및 새해 목표
Irealist | 2018.12.27 | Votes 0 | Views 630
Irealist 2018.12.27 0 630
112
[2018.12.21]공허
Irealist | 2018.12.22 | Votes 0 | Views 802
Irealist 2018.12.22 0 802
111
[2018.11.24]일상
Irealist | 2018.11.25 | Votes 0 | Views 440
Irealist 2018.11.25 0 440
110
[2018.11.09]홍콩에서 있었던 일 - 4: 홍콩행
Irealist | 2018.11.25 | Votes 0 | Views 602
Irealist 2018.11.25 0 602
109
[2018.10.21]육아의 어려움
Irealist | 2018.10.22 | Votes 0 | Views 507
Irealist 2018.10.22 0 507
108
[2018.10.07]홍콩에서 있었던 일 - 3: 구두 계약
Irealist | 2018.10.20 | Votes 0 | Views 517
Irealist 2018.10.20 0 517
107
[2018.10.07]홍콩에서 있었던 일 - 2: 아프리카 방송
Irealist | 2018.10.07 | Votes 0 | Views 642
Irealist 2018.10.07 0 642
106
[2018.10.06]홍콩에서 있었던 일 - 1: 실직과 구직
Irealist | 2018.10.07 | Votes 0 | Views 682
Irealist 2018.10.07 0 682
105
[2018.09.30]제대혈 보관
Irealist | 2018.10.01 | Votes 0 | Views 313
Irealist 2018.10.01 0 313
104
[2018.09.29]가을
Irealist | 2018.09.30 | Votes 0 | Views 337
Irealist 2018.09.30 0 337
103
[2018.09.28]아귀지옥
Irealist | 2018.09.29 | Votes 0 | Views 600
Irealist 2018.09.29 0 600
102
[2018.09.24]계획 세우기
Irealist | 2018.09.25 | Votes 0 | Views 551
Irealist 2018.09.25 0 551
101
[2018.09.16]결혼과 육아에 대한 생각
Irealist | 2018.09.17 | Votes 0 | Views 634
Irealist 2018.09.17 0 634
100
[2018.09.07]유비
Irealist | 2018.09.08 | Votes 0 | Views 438
Irealist 2018.09.08 0 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