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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6]홍콩에서 있었던 일 - 1: 실직과 구직

Author
Irealist
Date
2018-10-07 10:44
Views
683

도덕이란 무엇일까. 최근에 어떤 이와 대화를 할 계기가 있었다. 나의 관점에서 분명히 그 사람은 타인들에게 한두가지도 아닌 대여섯가지 부분에서 거짓말을 하고 금전적 이득을 취하고 있는데, 본인 스스로는 그것을 자기합리화할 수 있는 변명이 있었다. 나는 그에 분노하였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각자 스스로가 합리화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덕 기준을 세우고 살아간다. 물론 도덕은 완벽히 상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도덕 기준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이의 윤리 기준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범위마저 벗어난다고 해서 굳이 일일이 분노하며 살 수는 없다. 내가 그 부도덕한 행위의 피해당사자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다. 세상에는 숱하게 많은 부도덕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왜 이 사람의 행위로 인해 내가 큰 피해를 본 바도 없는데 왜 그리 분노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왜, 나는 타인들끼리의 문제에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가.


곰곰히 내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꽤나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한 얼굴을 보았다. 호감형의 젠틀한, 낯빛이 곱고 언변이 수려한 사기꾼. 묘하게 인간적인 구석이 있어서 그를 미워하려고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안쓰러운 생각도 드는 그 사람. 마지막으로 연락했을 때 구치소에 있다고 했던 그 사람. 아마도 나는 두 사람을 겹쳐 보았던 것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가 홍콩에서 겪었던 일을 더 이상 가슴에 담아두고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의 기억은 내게 큰 교훈을 주고 나를 성장시켜주었지만 어느새 무의식의 대나무숲에 뿌리를 내리고 나의 정신건강을 갉아먹기 시작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천일 가량 묵혀두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내가 기억하기 싫었던 기억이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인들이 연루되어 있기에 조심스러웠다는 것이며, 마지막은 내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분노, 그리고 실패한 기억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나의 잘못은 미화하고 타인의 잘못은 과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기 싫었던 기억이었지만 내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기억이다. 이제는 단편적인 기억들은 정확하게 남아있지만 사건의 전후는 조금씩 가물가물해지는 단계에 접어들었기에, 더 늦기 전에 이를 기록해두려 한다. 모든 한국인들은 이니셜로 표기한다.



1.


2015년 2월, 보스턴에서 V교수와 헤지펀드를 시작하려다 CIO였던 교수 남편의 부정직한 수익 기록에 항의를 하고 사직서를 낸 후, 나는 가지고 있던 취업 비자도 반납하고 8년만의 미국 생활을 마감했다. 당시 일기에는 "조금 휴식하면, 담담하게 다시 추스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적었지만 사실 마음 속은 썩어 문드러졌다. 미국 금융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안고 2007년에 뉴욕대로 편입한 이후, 우여곡절 끝에 트레이더라는 원했던 직업을 가지게 되고 미국인 교수와 헤지펀드를 설립하는 꿈과 같은 기회도 얻었다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과정에서 군시절 시작했다가 훈련 때 장막이 터져서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우기 시작했고 술도 많이 마셨다. 사직서를 내기 한 달 전부터 이미 미국 생활을 접는다고 생각을 하니 몸의 긴장이 다 풀려버렸는지 여기저기가 고장나기 시작했는데, 특히나 신장, 간, 장이 망가졌다. 소변을 보면 거품이 많은 단백뇨가 나왔고 속이 너무 안 좋아서 내과를 방문하였더니 장이 너무 약해진 상태라 천공이 날까봐 내시경도 못한다고 했다. 결국 검사 결과 장궤양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약처방을 해 주시면서 이 약을 먹고 호전되지 않으면 바로 대형 병원 응급실로 입원하세요, 라고 하셨다. 경북 경산 고향집으로 돌아가 요양을 했다. 한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미음만 먹었다. 2층에 죽은듯이 누워 있으면 어머니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죽을 끌여 가져오시는 나날들이었다. 사직을 하고서도 대구에서 조금더 요양을 했다. 이 때는 정말 거울을 봐도 안색이 너무나도 병색이었다. 다크서클은 진했고, 눈빛은 흐렸고, 낯빛은 노랬다. 몸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은 마음이었다. 이제 나는 실업자구나, 그렇게 미국 취업했다고 나대더니 빚만 잔뜩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온 채로 무직이구나. 내 미래를 믿고 투자했던 중현이는 어떻게 하나, 이제 무엇을 먹고 사나. 당시 "중력이 참 무겁다는 생각을 하였다"라고 적은 글이 있는데, 그게 정확한 내 심경이었다.

 

사실 미국에서 자신있게 사직서를 던지고 돌아온 배경은, 내가 시카고에 있을 때 마찬가지로 시카고에서 트레이더를 하다 아시아에 프랍 트레이딩 회사를 설립한 형이, 내가 보스턴에 있던 시절 10번에 걸쳐 본인 회사로 오라고 적극적으로 종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형에게 연락했을 때, 나는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업가 집안에서 자란 그 형은 비즈니스적인 결정을 내릴 때는 철저히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내가 아니라 그 보스턴 헤지펀드의 전략을 빼오고 싶었던 것이었다. 본인 회사는 거의 알고리즘 트레이딩 위주라 내 트레이딩 방식과는 핏이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란 사람이 그의 스탠더드에 맞지 않았던 것이니 그를 탓할 부분은 아니다. 그의 기준에 못 미치는데도 의리로 나를 받아주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사업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고 이미 있던 직원들에게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본인과 본인의 회사에 대해 철저하고 칼같이 행동한다면 적어도 타인에게도 똑같은 기준으로 대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스턴에 있을 때 6개월 정도 거기 있다가 아시아로 돌아와서 본인의 회사에 들어오란 이야기를 10번에 걸쳐서 종용했던 부분은 그의 경솔함이자, 보스턴의 V교수가 대단한 전략을 가진 듯해 보였던 데에 대한 과욕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렇게 구두로 10번을 이야기하였다는 것만으로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었던 내 순진함이 너무나 바보같았다.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그 형에 대한 섭섭함은 없다. 그도 사장으로서의 처신을 배워가는 과정이었고, 그의 선택 또한 지금의 내가 여기 있게 해 준 은인일 뿐더러, 그 당시의 나의 마인드셋으로는 분명히 거기서 트레이딩을 했더라도 손실을 냈을 것이니까. 그러나 당시에는 무척이나 씁쓸한 기분으로 그렇게 나의 구직이 시작되었다.

 

미국, 싱가폴, 홍콩, 영국, 닥치는대로 원서를 넣었다. 꼴에 마지막 남은 자존심은 있어서 어떻게든 다시 해외로 나가고자 했다. 왠지 한국에 안착해버리면 2004년부터 했던 해외취업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만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원서를 넣어도 서류를 통과하는 것도 힘겨웠다. 트레이더라는 직업과, 헤지펀드를 설립하고자 했던 것 때문에 내 자존심은 부풀어오를대로 부풀어오른 상태였지만, 이미 수학과와 컴퓨터과 출신들이 장악하고 자동화 물결이 궤도에 오른지가 오래인 산업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코딩 한 줄 할 줄 모르는 메뉴얼 트레이더가 설 곳은 없었다. 모든 트레이더 포지션은 코딩이 요구되었고, 트레이더가 아닌 금융계 포지션을 지원하려니 내가 지난 4년 간 트레이딩 이외의 업무에 전환가능한 스킬을 전혀 쌓은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가 있었던 시카고 프랍 트레이딩 회사는 시카고 거래소 플로어에서나 인지도가 있었지, 막상 한발짝만 산업 바깥으로 나가니 그저 듣보잡 중소기업에 불과하단 것을 깨달았다. 거기에 지리적으로 한국에 있어 비자문제는 고사하고 면접 보는 것조차 힘들다는 처지를 감안하면, 나는 개밥의 도토리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였다. 

 

이를 깨달은 나는 한국 회사들에도 닥치는대로 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또 중현이가 나를 도와주었다. 중현이의 예비 신부가 신혼집으로 이사하면서 광화문 경희궁의 아침에 원룸 전세 기간이 두 달 남았었는데, 그곳에서 두 달 지내며 구직활동을 하게 해 주었다. 4평 남짓한 원룸에서 런닝과 팬티 바람으로 너무나도 생소한 한국의 자기소개서란을 열심히 작성하다보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당시 그 발뻗기 힘든 자그마한 원룸에 영익혼 동생들이 찾아와 주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병수와 승준이는 생각해보면 내가 힘들 때마다 그곳에 있어준 고마운 동생들이다. 그러던 중 대학친구의 소개로, 한국의 트레이딩 업계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는 A를 만났다. A는 나와 동갑이었는데, 옷도 말쑥하게 입고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타입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2012년도 '장판지 사건'으로 인해 트레이더들이 거의 멸종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대충 한국거래소 직원이 모 헤지펀드와 결탁하고, 수익률 좋은 트레이더들의 거래기록과 주문을 전송해서 다 잡아먹었다는데, 상세한 방법은 잘 모르겠고, 그것 때문에 왜 수익률 좋은 트레이더들이 더이상 활동을 안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거나 더러운 바닥이라고 하던 뉘앙스만 정확히 기억한다. 

 

A의 소개로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한국의 트레이더 중에 굉장히 유명한, 모 금융사까지 인수했던 B회장도 있었다. 수천만원으로 1200억원을 만든 신화라고 하는 그는, 나도 예전에 인터넷에서 자주 보았던 이름이라 누군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A가 데려간 그의 사무실은 여의도의 번듯한 전망 좋은 곳에 있었는데, 인터넷에서 보던 것보다 너무나도 폭삭 늙은 B회장을 마주했을 때 보통 고생을 한 건 아니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산전수전 다 겪어 이제 뭔가 도가 트였다는 미소를 짓고 있는 자상해보이는 체구가 작은 아저씨였다. B회장은 나의 트레이딩과 수익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았는데, 사실 트레이딩에 관해서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보다도 그는, 상하이에 트레이더 교육 기관을 만드려고 하는데 내가 거기서 옵션 교육을 맡아주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 왔다. 나는 생각해보겠다고 했지만 딱히 그럴 생각은 없었다. B회장을 만나고 나오며, A는 맥주 한잔을 하러 가자고 했다. 여의도 근처 어느 바에서 맥주 한잔을 시켜놓고 A가 한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A는 B회장의 신화가 완전히 과장으로 점철된 허구이며, 수천만원을 1200억원으로 만든 게 아니라, 수천만원으로 수억에서 십억대를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500억 투자를 받게 되었고, 그 500억을 높은 레버리지와 리스크를 사용해 1200억으로 불렸지만, 다시 다 잃고 현재는 300억밖에 없다고 하였다. 100억은 현찰, 100억은 압구정인가 어딘가에 으리으리한 집, 그리고 나머지 100억은 미국 어느 도시에 학원을 만들어 쟁여 놓았으며, 투자자 및 빚쟁이들의 각종 소송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도 워낙 B회장이 유명한 사람이니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연락은 유지하지만 저 사람은 단물 다 빠져서 별 볼일 없으니, 본인과 함께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의 B회장에 대한 묘사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A가 한 제안이라는 것이 가히 기이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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